비가 와요. 바람도 강하구요.
이런 날씨에 이 포스팅을 읽는 모든 분들은 기분이 어때요?
난, 아침부터 꽤나 간만에 웃을 일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비밀이에요. 내가 부끄러운 일이었거든요.
MBC에서 최고의 역사왜곡을 그릴 드라마를 제작중이라고 하죠?
고려 최고의 강간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그저 발정난 숫캐같던 "충혜왕"에 대해서 미화한다고 지금 난리인 것 같아요.
하지원을 기황후로 낙점해서 기황후의 일대기를 그리는 드라마를 기획하에 준비하고 있다고 해요.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기황후를 중심으로 순제와 충혜왕을 삼각관계로 엮고 있고 또!! 충혜왕을 기개있는 인물로 묘사한다네요.
이렇게 역사 왜곡이 심한 드라마를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사람들이 보다보면 어이쿠...
벌써 걱정부터 앞서요.
뭐 그걸 바로 잡고 싶어서, 혹은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등의 거창한 이유는 아니구요.
예전부터 난봉꾼 충혜왕에 대해 포스팅하고 싶었던 것이 터진거죠 뭐..
자, 그럼 시작할께요.
아참, 다들 알죠?
딱딱한 역사이야기이기에 글의 진행은 반말이에요 ^^ 꼭 유념하고 읽도록 해요.
고려 최고의 난봉꾼 왕 - 고려 28대 왕 충혜왕 [ 忠惠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보면 충혜왕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
시호는 헌효, 충혜이며 고려 제 28대 왕으로 1330년에 재위했다가 1332년 원나라에 의해 충혜의 아버지이자 전왕이었던 충숙왕이 다시 복위해서 잠시 원나라로 리턴. 하지만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충혜왕이 다시 복위. 본성이 호협방탕해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후궁만도 100여명에 달함.
관제를 개혁해 과거의 고시관을 다시 지공거로 정승을 중찬으로 평리를 참리로 고치고 1331년에는 종래의 은병통용을 금하고, 한 개가 오종포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을 통용.
1342년에는 식화에 힘써 의성창, 덕천창, 보흥창의 포 4만 8000필을 풀어 시장에 전포를 열게 하고 1343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에 새로 궁궐을 지음.
이 때 개성에는 "왕이 민가의 어린아이 수십 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터무니 없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의 소란이 일기도.
그의 횡포함과 악날함을 이운,기철 등이 고발하여 원나라 순제에 의해 게양현으로 귀양가다가 악양현에서 죽음.
자, 여기까지가 백과사전의 이야기야.
그럼 이렇게 표현된 충혜왕에 대한 빛나는 업적(?)을 살펴볼께.
백과사전에서도 제일 처음 다룬 내용이 바로 방탕해서 주색을 즐겼다.. 라고 써져있어.
이 왕은 대체 업적을 찾아서 간략하게라도 쓰고 싶어도 안타깝게도 없어.. 그래서 그런지 사진도 겨우 한장을 구했을 뿐..
없어도 이렇게 없는 왕이 있을까 싶을 정도인 이 왕에게 굉장한 타이틀이 걸렸는데 그건 바로 "강간의 왕"
충혜왕은 충숙왕의 장남으로 공원왕후 홍씨의 아들로 1315년 1월에 태어났다고 하고, 이름은 정,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래.
1328년 정월에 원나라의 승인을 받아서 세자로 책봉되고 1330년 2월 충숙왕이 아프기도 했고 왕위에 염증을 느껴 정치에 물러나면서 왕위를 물려받고 28대 왕이 됐는데 이때 나이가 16세였어. 이해를 돕자면 충혜왕은 공민왕의 형이야. 고려 31대왕인 공민왕.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된 충혜왕은 그만큼 인격자체가 미성숙한데다 성격마져 포악해서 정사는 안중에도 없고
우리나라의 요즘 시대의 한참 사춘기인 청소년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향략과 여색에 젖어지내게 돼.
어느정도였냐면 즉위하고 6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사냥을 하러가고 날이면 날마다 내시들이랑 씨름을 했대.
더구나 이 왕이 아무것도 모르잖아. 어리니까. 그래서 국가의 중책을 일부 관료들한테 넘겨줘버리거든.
그래서 이때 관료들의 권력 남용이 하늘을 찔렀고, 또 자신을 감시하고 자신의 행적을 일일이 기록한다는 이유로 사관들을 싫어해서 자기 근처도 못오게 했다고 해.
공부하긴 싫고 그렇다고 누가 자신의 일에 간섭받기 싫어하는 사춘기 시절의 우리들이지 뭐.
충혜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충숙왕의 신하들이 자신의 일을 일일이 간섭하고 자꾸 잔소리를 하니까 빡치는 거야.
'이것들 봐라? 내가 누군데? 나 왕인데?'
그래서 이 어리고 철없어 놀기만 좋아하는 왕은 자신에게 옳은 소리하는 모든 신하들을 파직시켜버려. 잔소리는 아버지 한분으로 족하니까.
이때까지도 어리긴 했던 게 어느 날 충숙왕이 원나라 대도로 가는 길에 아들을 보게 되었는데 옷차림세가 너무나 호화로워서 충숙왕이 호되게 야단을 친적이 있다고 해. 충숙왕은 충혜왕에게 '날건달'이라는 말을 서슴치않고 하기도 하고 그를 비난했다니 아버지에게서 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왕이었어. 근데 이때 충혜왕은 충숙왕에게 반항하고 대든게 아니라 단지, 어린아이처럼 엉엉하고 울며 고려로 돌아갔다고 해.
그렇게 놀기 좋아하고 자신을 꾸밀 줄만 알았던 왕이 원나라 황족의 딸 덕령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어머나 세상에.. 엎친 데 덥친 격으로 색까지 알아버린거야.
그는 어느 날 황해도 장연에 가서 사냥을 하게 돼. 이때 그를 심복처럼 따르던 강윤충이 낭장 백유의 아내를 강간하는 일이 생기는데 주변의 모든 신하들이 입을 모아 극형에 처하라고 난리가 났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어린 왕은 그저 인상만 찌푸리고는 아무런 말도 없고 행동도 하지 않는거지. 답답함과 조급증이 난 신하들이 전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벌로 다시려달라고 매일 같이 상소를 올리지.
"전하, 명명백백 죄목이 들어나 피해를 입은 백유는 강윤충의 치졸함에 몸을 떨고 앓아누웠고 그의 아내는 자신의 타고난 미색을 한탄하며 자살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늘도 노여워 구름으로 하늘을 가릴진데, 어찌 왕이신 전하께서 이를 모르는 척 하실 수 있나이까!!!"
매일 같이 올라오는 상소에 지쳐버린 왕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의 관직을 파직하고 귀양을 보내지만, 자신과 죽이 잘 맞는 강윤충이 없으니 궁 생활이 얼마나 심심하겠어. 얼마가지 않아 그에게 다시 관직을 돌려주고 도로 불러들이게 돼.
이렇듯 왕은 정사는 안중에도 없고 날마다 사냥, 수박희(무술겨루기)구경, 격구 구경, 또는 물놀이 구경을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아부꾼들을 출세시키고 자신에게 잔소리만 하는 충신들의 말은 듣지 않으니.. 나라의 국고는 바닥을 치고 그 국고를 매꿔 다시 왕이 풍족하게 놀고 먹으려니 백성만 죽어나는거야. 이에 백성의 원성은 하늘을 찌르게 됐지.
원나라에서 봐도 정말 딱하거든. 그래서 그를 원나라 연경으로 소환해서 그곳에서 근신하라 명령하고 다시 충숙왕을 복위시켰어.
그런데 이 망나니 같은 왕이 말이야 지버릇 개 못준다고 그곳에서도 그렇게 여자들을 강간하고 놀기만 좋아하고 그랬대.
어느 정도였나 살펴보면
반성을 하라고 연경으로 소환해 놓았다니 반성은 커녕 위구르 족 사람들과 어울리며 어떤 여인에게 빠져서 아예 두문불출해서 발피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는데(발피는 곧 건달이라는 뜻이라고 해.) 한번은 원나라의 관원이 잡배들과 노략질과 계집질을 하는 놈들을 죄다 잡아드리게 되는데 이때 충혜왕이 껴있었던 거야. 그 무리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충혜왕은 관원에게 팔을 잡혀 패대기쳐지는 일까지 일어나는데, 관원은 그가 고려의 전왕인 것을 까맣게 몰랐어.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왕이 한나라의 불량잡배들과 어울려서 노략질하고 여색에 빠지고 그러겠냐고.
혀를 내두른 원나라에서 1336년 12월에 다시 고려로 돌려보내.
그리고 1339년 충숙왕이 병으로 죽자 바로 다시 복위하게 되지.
유일하게 무서워하던 아버지가 죽고 없으니 그는 더이상 거칠 것이 없어졌어. 그의 미친 행각은 이젠 도를 넘기 시작하지.
그가 왕으로 2년간 군림하면서 생각을 했던 게, 편하게 그가 놀고 먹으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었어. 바로 "돈"
이에 그는 왕으로 복귀하자마자 자신이 소비할 돈을 만들 목적으로 보흥고를 만들지.
여기서 잠깐 보흥고에 대해서 알아볼께.
보흥고란 충혜왕이 말 그대로 사사이로 즉 자신의 개인의 목적으로 만든 기구였는데 이는 유비창을 보흥고에 병합해서 그 기루르 일단 확대하고 모리와 수탈로써 많은 민전을 불법으로 귀속시켰던 기관을 말해. 말 그대로 합법화된 도둑질이라는 거.
나중에 충목왕이 즉위하면서 약탈한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주민에게 돌려주고 보흥고도 없어버리지.
다시 돌아와서, 충혜왕은 일단 지가 먹고 노는데 지장없이 돈을 비축하게 되자 바로 여색으로 눈을 돌렸어.
그중에 몇가지 사례만 적어볼께.
어느 날 그의 수족과도 같은 환관 최화상이 왕에게 황급히 달려와서 대단히 큰 일이라는 듯 주변을 물리고 왕에게 보고를 해.
"전하!! 홍융의 둘째 부인 황씨의 미색이 너무나 출중하여 천하절색이라고 모두들 입을 모아 칭찬을 한다고 합니다."
"오호라, 그래? 얼마나 미인이길래 헐레벌떡 들어오는가."
"그 미색이 이루 표현하기조차 숨차다 하옵니다. 백옥의 피부는 물론이고 입술은 앵두를 머금은 양 발갛고 양 볼은 붉게 불든 것이..."
"아니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의 여인이 있었는데 왜 아직 과인이 몰랐을고? 그대는 지금 바로 말의 고삐를 홍융의 집으로 돌리라!!!"
홍융이라 함은 충혜왕의 어머니 공원왕후의 오라비, 즉 충혜왕의 외삼촌이야. 한마디로 지금 논의되고 있는 사안을 현대말로 바꿔 이야기하자면,
"전하, 전하의 외숙모의 미모가 그렇게 뛰어나다고 해요."
"우리 외숙모? 이열,. 좋아 콜. 오늘 쳐들어간다."
황씨가 얼마나 미인이었는지 홍융은 황씨를 집 밖으론 절대 나오지 못하게 하였고 친척이 와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기때문에 홍융이 죽기 전까지 그녀의 미색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홍융이 죽고 나자 그녀의 바깥출입은 조금 자유로워졌으니 그녀를 본 모든 이들이 입이 마르도록 그녀의 미색을 칭찬하게 되서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거지. 한마디로 그녀의 짧은 자유는 그녀를 남은 평생 수치심에 떨게 만들었어.
사서에 보면 충혜왕은 항상 정력이 강해지는 열약을 복용해서 그와 관계를 가지는 여자들은 임질에 걸리는 일이 많았거든. 그래서 황씨도 대번에 임질에 걸렸지. 이에 충혜왕은 승려였던 복산을 시켜서 그녀의 임질을 치료하게 배려(?)하기도 했어.
이렇게 자신의 외숙모까지 강간하는 왕이었으니 일반 민가의 규수들은 물론이고 결혼을 한 유부녀들이야 오죽 쉬워겠어.
두 말하면 잔소리에 세 말하면 입만 아픈거지.
이렇게 막나가는 왕이 드디어는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하는데, 부왕의 후비였던 수비 권씨를 강간하고 몇 개월 뒤엔 후비인 숙공휘녕공주(경화공주)를 강간했어.
한마디로 자신 아버지의 여인들을 강간한거야. 와우, 대단한 녀석 같으니!
수비 권씨는 강간을 당한 후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이듬해에 죽었다고 기재되어있는데 아마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해.
자, 잠시 숙공휘녕공주의 강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께.
숙공휘녕공주는 검색하면 다들 알겠지만 원나라의 공주였어. 이 공주는 충숙왕의 두번째 왕비로 미색이 뛰어났다고 해. 고려로 시집을 오면서 경화공주라는 이름을 얻고 경화공주로써의 삶을 살게 되는거지.
충혜왕은 어느 날 연회를 베풀게 돼. 아버지의 혼령을 위로하고 앞으로 고려의 앞날에 안녕을 도모한다는 허울 좋은 연회였지.
왕은 공주보다 미리 일어나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는 척하며 돌아가자 마음이 놓인 숙공휘녕공주는 바로 침실로 자리를 옮기게 돼.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충혜왕이 침실을 덮쳤어. 공주가 완강하게 저항하고 반항하자 이 더러운 색골은 자신의 신하들을 시켜 공주의 팔과 다리를 결박하고 그 앞에서 강간을 해.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란 거야.
자신의 새엄마를 강간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신하들 앞에서 욕보이는 장면을 보인 공주의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
이 일을 겪은 공주는 수치심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분을 이기지 못해서 원나라로 돌아가 충혜왕을 고발하려고 말을 사려고 했어. 근데 이 호색한께서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눈치를 채셨네? 이에 충혜왕은 말 시장이 열리지 못하도록 했고 이에 실패했어.
이 일은 나중에 충혜왕 폐위에 아주 결정적인 원인이 되지.
이에 정말 빡친 재상 조적은 심양왕 왕고를 고려왕으로 삼고자하는 심양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는데 충혜왕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으니 명분은 이미 있는 셈이잖아. 그래서 이 사건을 계기로 수하들을 거느린 체 충혜왕을 치려고 궁으로 쳐들어가는데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충혜왕의 악소배들에게 막혀 궁에 못들어가게 된거야. 이 소식은 충혜왕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기병 20여명과 함께 조적을 쳤어. 조적의 온몸에 화살이 박혔고 조적의 목은 잘려서 다리에 걸리게 되면서 사건은 마무리 되는 듯 해.
더 웃기는 건 충혜왕이 이렇게 조정을 어지럽히며 난봉꾼의 시간을 보내던 시기가 아직 원나라에서 왕의 싱인도 받기 전이라는 거야. 대체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원나라에선 중서성 단사관 두린과 직성사인 구통을 개경에 파견해서 충혜왕에게 국새를 내려 복위를 인정하게 돼.
그런데 두린 일행이 개경에 도착해 경화공주를 찾아가 원나라 왕이 보낸 술을 건냈는데 공주는 그것을 보더니 울먹이며 마시지도 못하고 손에 들고 부들부들 떨면서 닭똥같은 눈물만 뚝뚝흘리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두린이 공주에게 물었어.
"아니 공주님, 비천한 제가 이렇게 그리우셔서 우시는 것은 아닐테고 대체 무슨 연유로 소리도 없이 눈물만 흘리십니까?"
그래도 공주는 입을 앙다물고 아무런 말 없이 눈물만 흘리더니 주변 신하들을 모두 물리고 나서야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넣었고 공주의 입에서 전해진 이야기들을 들은 두린은 참을 수 없는 화를 느끼게 되지.
"고향에서 이곳 고려로 시집와 그들과는 융화될 수 없는 삶조차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곧 죽을 날 받아놓은 늙은 왕에게 시집을 왔어도, 또 대신들이 뒤에서 나를 왕비 대접하지 않고 수근거리며 어울릴 수 없는 이질감 가득한 눈으로 나를 대했어도 나는 내가 고려에 온 것을 후회하거나 아버지의 뜻을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 지옥같은 곳으로 보내신 아버지의 의중을 수도 없이 의심하고 있어요. 과연 아버지께서는 제게 조금의 애정도 남아있으시긴 하답니까? 전, 차마 제 입으로 말하기도 힘든 일을 겪었습니다. 원으로 도망갈 심산으로 말을 사려해도 지금의 왕이 말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여 길을 막고 서신을 보내고 싶어도 저의 발과 입이 되어줄 만큼 믿을 만한 자 또한 이곳엔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죽어버리고 싶습니다."
"아니, 공주님,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신에게 속시원하게 털어놓으십시오."
"아드님, 지금의 왕인 충혜왕에게 겁탈당하여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고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체 살고있습니다."
이에 두린 일행은 참을 수 없었어. 그 어떤 왕보다도 치졸하고 폐륜적인 충혜왕을 용서할 수 없었던 두린 일행은 가져왔던 옥새를 주러간 것이아니라 충혜왕을 비롯해 강간사건에 연류된 홍빈, 한첩목아불화, 조운경, 황겸, 백문거, 왕백, 주주, 조영휘, 이안, 한승, 장거재, 배성경등을 포박해서 연경으로 압송했지.
충혜왕이 압송되니까 당연히 정권은 남아있는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은 경화공주에게 넘어갔어. 이에 그녀는 제일 먼저 충혜왕이 자신을 강간하도록 방조하고 도움을 준 찬성사 정천기를 정동성에 가두고 정동성의 관리들을 대폭 교체했어.
그렇지만 원나라로 압송된 충혜왕이 1340년 3월에 형부에 갇히고 같이 잡혀갔던 무리들이 심문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 해 3월 충혜왕은 탈탈대부의 도움으로 풀려나고 4월에 개경으로 돌아왔어. 이 무렵 원나라에서는 고려인 출신 여자 기씨를 순제의 제2왕후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기황후"
그렇게 모진 고문을 당하고 돌아왔는데도 이 철없는 호색한이었던 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예전과 같은 음행을 일삼지.
1341년에 왕이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처 강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호군 박이라적으로 하여금 궁중으로 데려오게 했는데 이라적이 데려오면서 그녀의 미색에 빠져 왕보다 먼저 그녀를 겁탈한거야. 이에 왕이 빡쳐서 그 두 사람을 그 자리에서 직접 때려죽였어.
또 그 해 11월에는 내시 전자유의 집에 갔는데 그의 처를 강간하고 며칠 뒤에는 지가 때려죽인 박이라적의 처를 찾아가 강간했고, 임홍보의 시비와 간음하고 재상 배전이 원나라 사신으로 가고 없는 동안 배전의 처와 그의 동생 금오의 처를 강간했어.
휴.. 다 쓰지도 못할 정도로 그는 발정난 숫캐 마냥 여기저기 강간하는 짓을 멈추지 않았어.
하지만 충혜왕의 빛나는 업적은 단순히 음탕한 행위에만 그치는 건 아냐.
1343년 3월 어느 날 밤에 민천사 누각에 올라 비둘기를 잡는답시고 횃불을 들고 설치다가 누각을 다 태운 일하며, 그 다음 날엔 자신의 연회장을 만들기 위해서 민가 백여채를 철거하고 토지와 재산을 강탈하기도 했지.
또 그 해 4월에는 개경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그 소문은 다음과 같아.
"왕이 이번에 민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연회장을 만든다고 하던데 그 연회장을 지탱하는 주춧돌 밑에 어린아이 수십 명을 잡아다가 파묻으려 한대!!"
오죽 못난 왕이면 자신이 다스리는 국민들 조차 그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을까. 생각하면 참 가슴이 먹먹하기도 해.
왕에 대한 믿음인 이미 이렇듯 바닥을 친거야. 이에 개경 사람들은 이 근거없는 소문에 어린 자식들을 품에 안고 두만강을 건너는 일이 속출하지.
민가를 밀고 토지를 빼앗았으니 공사를 해야겠지. 이에 백성들은 강제부역에 동원됐고 사람들이 노역을 하느라 농사를 짓지못함으로 인해서 삶은 점점 피폐해지기 시작했어.
이쯤 되면 궐기가 일어날만도 한대 말야. 이 왕이 얼마나 포악했으면 민심이 흉흉하되 제대로 궐기를 들고 일어나는 자가 없었어.
그러던 어느 날 이를 더는 볼 수 없었던 현효다가 왕에게 독약을 먹이려고 했어!!
근데 실패해. 그리고 사형당하는데 이에 기황후의 오라비인 기철을 필두로 충신들 몇이 원나라 조정에 고발하게 돼.
"더는 충혜왕의 폐정을 지켜볼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했습니다. 그는 일반 농가 백여 채를 밀어버리고 토지와 재산을 강탈하는 것도 모자라 새로운 궁궐을 짓기위해 강제로 노역을 시키고 공사를 하는 도중에도 직접 공사장 담장에 올라가 시시때때로 감시하며, 궁궐이 준공되자 각 도에서 칠을 거두어 들여 단청하였습니다. 단청의 안료를 수송하는 기한을 늦추기라도 하면 그 벌로 몇 곱의 값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하니 어떻게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왕은 폐륜해 마지 않는 여색으로 나라의 법도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제발 제발 왕을 폐위시켜 무너진 왕권을 바로 잡아주십시오!!!"
이에 원나라는 더는 그를 봐줄 수가 없었어. 망나니에 자신들도 두손 두발 들었던 왕을 다시 붙잡아들이기로 결정하지.
하늘에 제사할 것과 대사령을 반포하라는 원나라 순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다는 핑계로 고려에 당도한 원나라의 대경 타적과 낭중 별실가 등의 6명은 마중나온 충혜왕을 발로 걷어차 포박하여 원으로 압송하는 한편 왕의 호위무사들 중 두명은 피살되었어.
충혜왕은 급하게 걷는 그들에게 좀 천천히 걷자고 말하자 그들은 칼을 빼들고 위협할 정도로 그를 막 다뤘다고 해.
원으로 압송된 충혜왕은 게양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는데 게양은 연경에서 2만여 리 떨어져있는 먼 곳이었거든. 충혜왕은 이곳을 향해 가던 중 악양현에서 1344년 정월 30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독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을 때, 아무도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기뻐서 날뛰는 사람들이 마을의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고 해.
'지식정보 > 인물-역사-신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 왜곡의 최대 수혜자 - 민자영. 민비 (0) | 2022.05.02 |
---|---|
리차드 트랜튼 체이스(Richard Treton Chase) (0) | 2022.05.02 |
존 웨인 게이시 [ John Wayne Gacy ] (0) | 2022.04.29 |
조선시대의 자유부인 - 신사임당 (0) | 2022.04.29 |
여태후(呂太后) (0) | 2022.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