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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왜곡의 최대 수혜자 - 민자영. 민비

알콩달콩아빠 2022. 5. 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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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포스팅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에요.

 

 

 

역사적 사실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많은 자료를 준비했으나, 저에 모자란 필력으로 얼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습니다만,

즐겁게 읽으시고 유익한 시간되시길 바래요.

 

저의 포스팅은 오늘부터 반말로 이야기하듯 쓰여집니다.

워낙에 딱딱한 말투자체를 싫어하는 것도 있지만 역사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필자의 사족과 함께 필자의 생각도 끼워넣을 예정이니 객관적인 사실만을 원하시는 분들은 지식백과를 이용하시길 바래요.

 

또한, 반말이 기분나쁘다고 댓글달고 그러지마요.

엄밀히 따지면 이곳은 내 개인적인 공간,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든간에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되니까 

 

자, 그럼 시작할까요?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라 불린 그녀. - 민자영. 민비 그리고 명성황후.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 ~ 1895

 

 

 

명성황후는 여흥 민씨로 여주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자영.

그녀가 태어난 집안은 숙종을 두고 장희빈과 삼각관계를 겨루었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민씨가였는데, 그녀의 아버지인 민치록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5대손이었어. 이런 가계를 통해 볼 때 그녀의 집안은 당색으로는 서인계였고 민치록이 세도정치가인 철종 때 음서로 관직에 오른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꽤 내노라하는 집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어.

 

민치록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지방관과 중앙의 중간관리 벼슬을 했지만 자손이 훗날 민비가 되고 현재에 와 명성황후로 탈바꿈한 딸인 자영 하나만을 남긴 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자영의 나이 8세였어. 이후 자영은 어머니와 함께 여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감고당에서 기거하였는데, 당시 서울에 집을 소유한 것을 볼 때 집안 형편은 넉넉했던 것으로 보여지만 당시 시대상으로 볼 때 아들이 없다는 것은 이미 집안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지.

 

자영은 어렸을 때부터 상당히 총명해 주변의 칭찬이 자자하고 집안이 단촐하였기 때문에 훗날 자영의 시아버지인 대원군의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해.

 

대원군은 당시 세도정치를 없애기위해 고군분투하고있었음으로 배경이 없는 민자영이 여간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었어. 이런 며느리가 자신의 뒷통수를 칠 날이 올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지.

 

 

여기서 잠깐 벗어나서, 흥선 대원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애.

 

 

흥선대원군 1820 ~ 1898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20에 태어나 1898까지 살다간 고종의 아버지이며 민비의 시아버지인데, 조선의 실세로 살다간 선조들 중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던 자로 훗날에도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을 맡게 되었어. 그가 정치를 주도했던 19세기 후반 조선은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따라잡지는 못했지.

 

 

 

 

흥선대원군의 집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섭정 시기 운현궁과 궁궐을 직통으로 연결되었으나,

그 문이 폐쇄되면서 대원군의 섭정도 끝이 났다.<출처: (CC)Daderot. At Wikipedia.org>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안동김씨 주류들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내고 그 와중에 국정 공백을 막기 위해서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부패 관리 척결에 힘썼고, 조선 후기 오랫동안 계속된 붕당 간 갈등과 국가 재정 파탄의 일부 원인이 전국에 널리 퍼진 서원에 있다고 보고 47개의 중요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했지. 19세기 변화된 사회에 적합한 법률 제도를 확립하였으며, 비변사를 폐지하고, 양반에게도 세금을 징수해 국고를 늘렸고, 사치를 근절하기 위해 의복제도를 고치고 사창제도의 실시로 지방관리의 부정을 막아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힘썼어.

 

그러다 그의 수렴청정은 10년이 되면서부터 몰락하기 시작하는데, 이유를 굳이 뽑자면 무리한 경복궁의 중건으로 다시금 피폐해진 서민의 삶과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고 쇄국정치로 인한 급변하는 세계를 몰랏다는 것과 가장 중요한 그에게서 독립하고 싶은 고종 내외로 인해 강제로 물러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로인해 강제로 물러난 탓에 흥선대원군은 정계복귀를 호시탐탐노렸으나, 쉽지 않았고 민비의 시해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거야. 얼마나 며느리에 대한 원망이 컸을지는 뭐 안봐도 뻔한거지.

 

자, 다시 이야기로 돌아올께.

 

우선 이해를 돕기위해 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사실부터 이야기할꺼야.

 

명성황후는 처음부터 대원군에 맞서는 지략적인 정치가는 아니었는데, 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 건 시대의 흐름을 읽고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명성황후의 노력.... 이라고 백과사전에 표기되어있어. 이건 나의 생각이 아냐. 백.과.사.전에 나와있는 말이야.

 

민자영은 16세에 위에 서술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총명한대다 외가세력이 없다는 것이 흥선대원군에게 크게 어필해서 고종과 혼례를 올리게 되는데, 고종은 이미 마음을 빼앗긴 여인이 있었어. 상궁 출신의 궁인 이씨를 매우 좋아해서 자영을 냉대했었대. 업친데 덥친 격으로 자영이 아들을 낳기도 전에 궁인 이씨가 아들 완화군을 낳자 궁중의 관심은 모두 궁인 이씨에게로 몰렸지. 이에 대원군은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까지 했다고 해.

 

그런데 왜 대원군은 서자 출신인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했을까? 더구나 민씨의 나이는 한참이나 어렸고 아직 아들을 낳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말야.

 

이유는 세도정치를 겨우 몰아낸 흥선대원군은 배경없는 왕비가 혹여라도 힘을 모아 외척이 발호하는 것이 두려웠기때문에 신분도 낮고 가문도 별볼일 없는 궁인의 자식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외척에게 시달리지 않고 왕권을 더욱 오롯이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실제로 민자영은 총명해서 대원군의 사람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그녀의 양 오빠 민승호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고 대원군의 형인 이최응, 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까지도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고 해.

아마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던 사건으로 인해 민자영은 느끼는 것이 많았을거야. 그로 인해 민자영은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고 대원군이 운신할 범위를 점차 좁혀가기 시작했어.

 

후에 민자영은 고종의 사랑을 회복해서 아들을 둘이나 낳았지만 모두 요절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대원군의 원자에 대한 무리한 약 ㅈ처방이 그녀의 심리를 불편하게 하면서 민자영은 시아버지에게 완전히 돌아서 왕인 고종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로 결심하게 되지.

 

 

흥선대원군과 민비.

 

 

 

더구나 당시 경복궁 중건으로 인해 대원군의 수렴청정은 끝이 나고 있었으니 민자영의 기세는 날로 드세졌지.

 

그리고 격변하는 시기에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일본에 의해 시해당하는데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부끄러운 역사지. 요즘엔 공식적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라고 부른다지?

 

 

"내가!!!! 내가.. 내가!! 바로 조선의 국모다!!!"

 

라며 멋지게 엔딩을 장식하고 장렬하게 죽어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것은 사실이 아냐. 완벽하게 왜곡되고 미화된 거야.

 

 

 

 

자, 바로 지금부터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해.

 

뭐 알고 있는 사람들 또한 많을거야.

하지만 아직도 드라마에 빠져 그것이 사실인 양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민자영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일 수록 그녀를 빈, 혹은 씨로 부르기도 하고 희대의 국민 쌍년으로 부르는 사람까지 봤으니까 말야.

 

 

 

자, 시작할께.

 

 

 

 

 

이야기 하나, 궁에 남자를 끌어들인 왕비

 

이건 풍문이긴 하지만 민자영은 처음에 시집왔을 당시 고종에게 냉대를 받았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그가 그녀에게 뿅!! 가는 건 무리잖어. 나이를 먹어가면서 고종이 미에 대한 가치관이 확립되고 점차 민자영을 여자로 보기 시작했는데 민자영은 고종에게 어필하기 위해 장안에서 내로라할 만한 정력가들을 궁으로 몰래 불러들여 교습아닌 교습을 받았다고 해. 그렇게 섹기 넘치는 모습을 매일 밤 고종에게 어필했고 고종은 밤마다 민자영만을 찾았다나 뭐라나.

 

이야기 둘, 사치스러웠던 왕비

 

또한, 민자영은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자신의 세력을 양 오빠인 민승호를 주축으로 해서 넓혀가기 시작했어.

그녀는 권력욕이 대단했고 사치가 심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자신의 사치를 충당하기 위해서 흥선대원군이 10년 간 수렴청정하여 양반에게도 거둬들여 늘려놨던 국고를 단 1년 만에 바닥이 드러나게 해서 끝내는 군의 재정까지도 손을 댔지. 오죽하면 조대비 장례식 비용이 없어 쩔쩔 맬 정도였으니 말야.

 

더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민자영은 군의 재정에 손을 댔다고 했잖아. 그로 인해서 구식군대의 봉급은 1년이나 체납되고 그로 인해서 민심은 흉흉해지고 있는데 어느 날 정말 오랫만에 봉급을 준다기에 다들 기대에 부풀어서 쌀을 타러갔지. 그런데 누가 중간에 물에 불어 썩은 쌀과 모래로 바꿔치기해서 떼어먹은데다가 그 합한 양 마저도 적은 쌀을 준거야. 얼마나 열받아. 그래서 구식군대를 주축으로 한 군란이 일어나는데 그게 그 유명한 '임오군란'이야. 역사책에는 거창하게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라고 써놨지만 그건 실상과 다른 사실이야. 이 또 한 민자영을 미화하기 위한 계책이 아닐까 싶어.

 

더구나 그녀는 자신의 미색을 돋보이기 위해 국고를 낭비했어.

그녀는 치장하기를 좋아했고 한번 입은 옷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고 전해져. 와우, 조선에도 마리앙뚜와네트 같은 왕비가 있었단 거지!!

 

이야기 셋, 투기가 심했던 왕비.

 

조선에 칠거지악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질투인데 일반 아낙도 아닌 한나라의 국모였던 여인의 투기가 하늘을 찔렀다는 사실. 타의 모범이 되야하고 나라의 살림을 잘 다스리고 보살펴야했던 왕비는 그저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데 정신이 팔려 고종의 사랑만을 원했으니, 질투야 당연한 결과겠지.

 

고종은 어려서부터 여자를 밝히기로 유명했다는데, 앞서 말했듯 이미 결혼 전부터 정인이 있을 정도였어.

하지만 왕이 후궁을 거느리는 것은 지탄받을 일도 아니었고 궁안에 모든 여자는 왕의 여자였으니 욕할 것도 아니지.

그런데 민자영은 자신의 입지를 날로 좁혀오는 상궁들이 그렇게 싫은거야.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날, 왕의 총애를 받던 궁인 중 장여인이라는 상궁을 찾아가 다짜고짜 "내 칼을 받으라!" 며 소리를 질렀다고 해. 상궁 장씨가 제발 살려달라고 싹싹 빌자 측은지심이 일어 그녀를 살려주지만 "상감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자네를 죽일 수는 없지만, 내 절대 이 궁안에서는 살 수 없게 만들어주마!" 라고 호언장담한 후 그 곳에서 장정 두 사람을 불러다가 장씨를 결박하고 음부 양쪽의 살점을 칼로 도려내 궁 밖으로 내보냈다고 해. 그로 인해 장씨는 평생 상처로 고생하다고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그 후로도 민자영은 왕에게 승은을 입은 수 많은 후궁들을 궐 밖으로 내쫓았는데, 어떻게 내쳐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길께.

 

이야기 넷, 미신을 신봉하여 궁에 무당을 들인 왕비.

 

민자영은 각종 미신을 믿고 이로 인해 제를 들이는데 드는 비용을 아끼지 않았는데, 1874년 원자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어. 이에 민자영은 당시 유명한 맹인 무당을 원자전담무당으로 고용하는데 이 고용비로 정이품대우를 해주고 지금의 혜화동에 북관묘를 지어 처첩을 거느리며 살게 했다고 해. 또 이유인이란 무당은 임오군란 당시 겨우 궐을 빠져나와 장호원에 머물 때 궐로 돌아갈 날짜를 정확하게 맞췄는데 그에 댓가로 비단 백필에 만냥을 받았어. 이쯤 되자 미신에 대한 민자영의 신봉은 하늘을 찌를 듯해서 궁안에 여러 무속인을 두고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지.

 

더구나 굿의 비용때문에 벼슬을 팔기도 했다는데 원자의 건강을 빌면서 금강산의 봉우리마다 굿판을 벌였으니 돈이 어딨어. 당연히 바닥을 치지. 그래서 결국 그 돈을 충당할 수 없었던 민자영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벼슬을 돈 받고 팔았대. 대박. 그렇게 얻기 쉬운 벼슬이 아닐텐데.. 이러니 조선 후기때 인재등용시험에서 기본이 3만냥, 장원급제는 7만냥이라는 소문이 돌았겠지.

 

이야기 다섯,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박쥐같았던 왕비.

 

민자영의 외교전략이 탁월하다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

그런데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개혁정책을 했던 왕비가 신봉했던 것 고작 미신이었잖아.

본인도 믿지 못하는 서양의 의술이나 과학에 근거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미신에 의존해 국고를 낭비하던 왕비를 나는 솔직하게 '박쥐'같다고 생각하거든.

 

자,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처음 민자영은 임오군란으로 잠시 재집권을 했던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기 위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지. 그로 인해 흥선대원군의 군란이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납치되가지. 이후 민자영은 흥선대원군 측근들을 숙청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와중에 일본에서는 벌써부터 조선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점찍어두었는데 청에 개입으로 물거품이 되게 생겼거든. 이에 민자영을 죽이기로 결심하지.

 

역사에서 처럼 민자영이 똑똑하여 그녀가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라고 결론 짓기에는 무리가 있는 게,

일본은 이전부터 조선의 정치에 감놔라 대추놔라 하면서 간섭을 하고 있는 중이었거든. 이건 민비가 직접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게 함과 동시에 왕비 중심의 세력으로 정권을 구축하며 개방정책을 펴서 1876년 일본과 수교한 이후 부터였어.

그런 민자영이 일본을 배신하고 청과 결탁하여 자신들을 몰아내니 얼마나 빡쳐. 그래서 흥선대원군과 결탁해 민자영을 죽이기로 결심한거지. 그게 바로 갑오개혁.

그러자 이번에 민자영이 붙은 쪽은 러시아였어. 러시아와 결탁해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했는데 빡칠대로 빡친 일본의 미우라 고로는 1895년 8월 20일 일본의 정예무사들에게 민자영의 척살을 지시해.

 

자, 역사서엔 분명히 낭인들로 표기되어있지만 그것은 절대 사실이 아냐.

그들은 일본의 정예무사였고 꽤나 엘리트들로 꾸며진 나름의 군대였다고 해.

 

그리고 민비의 시해 당시 민비는 상궁의 옷을 입고 앉아있었다고 했잖아. 그러다가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상궁들이 죽어나가자 측은지심이 일어 발딱 일어나

 

"내가!! 내가 바로 조선에 국모다!!" 라고 외치며 멋지게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이도 아니었다고 해.

 

그녀는 끝까지 상궁들 사이에 숨어있었는데 상궁들이 하나씩 처단되고 자신의 차례가 가까이 오자 살려달라고 울고 불며 매달렸다고 해. 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녀가 그들이 찾던 민자영이란 사실을 그녀를 죽이고도 한참 뒤에나 알았다고 하니, 어쩌면 민자영이 자신의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국모다운 면모를 보였다면 아마 그들은 그녀를 죽이기보단 자신들의 볼모로 데려가지 않았을까?

 

 

자,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있는 민자영, 민비 또는 명성황후로 불리워지는 조선의 마지막 국모에 대한 이야기야.

 

그녀를 단지 민자영, 혹은 민비, 또는 명성황후 세 호칭 중 하나로 부르는 것은 여러분들의 몫이긴 하지만 확실한 건,

그녀가 지금에와서 이렇게 아름답게 미화되었듯이 흥선군으로 인해 희생된 정치적이고 애국적인 여인으로 칭송받기는 무리가 있다는 건 단연 사실인 것 같아.

 

그녀는 나라의 부강보다는 자신의 안위와 자신 세력에 대한 집착, 그리고 미신으로 인한 국고를 탕진한 건 사실이니 말이야.

 

우리, 바로 잡을 건 바로 잡으며 살았으면 해.

 

 

 

 

 

 

 

 

 

 

 

 

※ 한마디만 덧붙일께요.

 

일본의 정예무사가 됐든, 혹은 낭인이 됐든 일개 국민주제들이 한나라의 국모를 시해한 사건은 그들이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죠. 당연히.

어떤 분들이 저의 포스팅을 보시고 그녀의 시해자체가 당연한 결과 혹은 애국심이 없다 등으로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자,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애써 만든 허황된 이미지. 그걸 파기한다고 해서 나에게 애국심이 없다고 생각지 않아요.

다만, 더 옳게 기억하고 더 바르게 계승해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버릴 건 버려야 우리에게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만약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아름답게 포장하기만 급급해서 애국심을 논한다면...

과연, 정신대로 끌려간 할머니들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본인이 선택한 '창녀' 라 말하고

엄연히 지들 옛지도에도 우리나라 땅이라고 표기되어있는 '독도' 를 지네것이라고 우기는 일본 잔네비들과 다를 게 뭘까, 생각해 봐요.

그들은 분명 지우고 싶은 과거이기 때문에 포장하고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일테니까요.

 

올바른 역사 인식,

그것이 바로 진정한 애국심의 첫 걸음이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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