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포스팅 인물은,
미국을 대표하는 살인마 중 으뜸이라고 볼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존 웨인 게이시.
지금 시작합니다.
"광대 살인마" - 존 웨인 게이시 [ John Wayne Gacy ]
1942년 3월 17일. 일리노 이주 시카고의 폴란드계의 가난한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스텐리는 알콜중독이 심하고 자신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사나운 술주정뱅이였다.
스텐리는 처음 아들이 태어났을 때 서부극에서 인기를 얻은 미국 남성상으로 키우고 싶어했기에 그를 엄격하게 키웠으나 아들에게 심장 질환이 있다는 것이 발견된 순간부터 실망하고 그를 비난하고 비웃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무서웠던 게이시는 아버지를 피해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들에게 의지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점점 여성적인 성격이 되었는데 이 모습에 그의 아버지는 틈만 나면 그를 "계집애"라고 불르며 그를 멸시했고 잦은 폭력으로 그의 여린 인성을 멍들게 했다.
그는 땅딸막한 심기증 환자에 동성애 성향으로 인해 심각한 자기혐오에 빠진 채 성장했는데 그랬기에 그는 "정상인"처럼 보이기 위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오와 주 워털루에 정착했으며 그곳에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가게를 운영했다.
그에 대한 주변의 평판을 좀 살펴보자면 성실한 사업가에 친근한 이웃이며 사회에 헌신하는 구성원으로 매우 긍정적인 인간으로 비춰졌는데, 민주당원으로써 정치에도 관여하여 카터 대통령의 영부인과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과 혐오를 가지고 있던 그가 그런 모습을 유지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자신의 내면을 꽁꽁 숨긴 체 "정상인"으로 삶을 포장하던 게이시에게는 큰 걸림돌인 본능이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남색"이었다.
그는 동성애적인 성향을 가진 자신을 심하게 꾸짖고 탓하면서도 쉽사리 그 유혹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본능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그가 1968년 소년을 성적 학대의 목적으로 만났다는 혐의로 10년 형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게이시는 이혼을 당하게 되었고
"정상인"으로 살고자 했던 그의 꿈은 이때부터 산산조각나기 시작한다.
10년 형을 받았던 그는 고작 18개월 만에 나오게 되는데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훗날 그가 서른 세명의 살인자로 법정에 섰을 때, 마지막 희생자였던 로버트 피에스트의 가족은 시카고 경찰 당국을 상대로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하게 되는데,
이때 만약 게이시가 10년형을 제대로 살고 나왔다면 무고하게 서른 세명이나 되는 안타까운 목숨을 잃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출소 후, 모든 것을 잃은 게이시가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훗날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가 그렇게 "정상인"이길 원했던 이유를 밝히며 게이시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는 태어나 단 한번도 인정받지 못한 내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더럽고 추악한 동성애자인 내 자신을 경멸하고 혐오했죠.
내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일은 이 계집아이 같은 성격을 버리고 진정한 남자가 되는 일말곤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나는 모든 것을 망쳤어요. 바로 그 빌어먹을 남자녀석들때문에 말입니다!! 난, 그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어요. 그들은 본인들이 원하지 않았다고 할테지만 난 그들이 나를 갈구하던 눈빛을 알 수 있었어요. 난 진정 그들을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존 게이시의 범행은 자백에서 1972년부터 시작했다고 했으니 약 6년 간 지속됐는데 위에 나열한 그가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정상인"으로써의 삶과 사람들의 평판으로 인해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범행이 막을 내리게 된 것은 1978년 12월 13일 로버트 피스트(Robert Piest) 살해 혐의로 체포가 되면서다.
당시 이웃주민들은 그의 집을 들락이던 젊은 남자들이 잦다는 점과 자주 바뀐다는 점을 기이하게 생각하여 예의 주시하고 있는 시점에서 피스트는 새로운 알바의 면접을 위해 사장을 만나러 간다며 일하던 약국을 다녀간 뒤 실종되었는데, 그 약국의 주인이 바로 게이시였다.
처음 게이시는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한 추궁을 강력하게 부정했고 자신을 추궁하는 경찰에게 비협조적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그의 집을 수색하기 위해 영장을 발부 받았다. 이로써 그의 이중적인 생활이 파헤쳐지기 시작한다.
처음 게이시의 집을 수색할 당시 이렇다할 증거를 찾지 못해 고군분투하던 경찰들은 그의 지하실에서 피해자인 피스트의 유품을 발견하게 되면서 수사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유품을 보며 게이시는 당황하는 기색없이 말했다.
"지난 달에 이곳에서 우린 사랑을 나눴습니다. 자, 나를 이제 동성애에 대한 법률 위반으로 체포하시죠?"
하지만 경찰은 그에 대한 의심을 풀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게이시의 지하실을 파기로 결정했다. 이에 게이시는 다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1978년 12월 22일 금요일, 마침내 자신의 범죄사실을 자백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에도 게이시의 자백은 반성하는 기미나 범행을 후회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들은 나와 성관계를 맺은 뒤 나에게 돈을 요구하며 협박했어요. 이해가 되세요? 내가 좋다고 그들이 먼저 내게 접근해놓고 거사를 치른 뒤엔 모두 하나같이 돈을 요구했어요. 정말이에요. 난 그들을 죽이려고 죽인 게 아니란 말이에요. 우연치 않게 칼이 보였고 나를 신고하겠다며 달려드는 그들과 몸싸움을 하다가.. 정말이에요. 그들이 먼저 날 때렸어요. 그래요. 그들은 날 협박하고 멸시하고 비웃으며 날 모욕했어요. 난, 내 방어차원에서 살인을 하게 된거란 말입니다."
하지만 위의 자백에 대한 신빙성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집에서 시체발굴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게이시의 차고 땅 밑에서 존 부코비츠라는 젊은 남성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게이지 집 바닥 밑 좁은 공간에도 한구의 시체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에 경찰은 경악했다.
친절한 이웃이며, 자신을 광대로 꾸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민주당의 당원으로 정치적 활동도 활발히 하던 그의 이중적인 모습에 그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땅을 파헤쳤고 이후 스물 다섯 구의 시체를 더 발견함으로써 총 스물 일곱구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시체는 게이시의 집에서만 발견된 것이 아니었는데 "데스 플레인스(Des Plaines)" 강에서 발가벗겨진 채 시체로 발견된 프랭크 웨인 랜딩 역시 게이시의 희생자로 확인되며 명단에 추가 되었고, 12월 28일 제임스 마자라의 시체도 발견되었다. 그의 목구멍 안에는 그의 속옷이 쑤셔 넣어져 있었고, 검시관은 그것이 마자라를 질식해 숨지게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마자라는 희생자들 중 스물아홉 번째 희생자였는데 왜 그를 강가에 버렸냐는 경찰관에 물음에 게이지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내 집이 꽤나 넓다고 생각했소. 그런데 더는 묻을 곳이 없지않겠어요? 생각을 해봐요. 차고에도, 지하바닥에도, 침실 바닥에도, 욕실 바닥에도.. 당신들은 내가 손쉽게 그들을 처리했다고 생각하겠지만, 틀렸어. 난 그들을 매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나와 함께 둠으로써 위로한거란 말이지. 그래서 강가에 버리된 마자라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소"
경찰은 그 다음 해 2월이 끝날 때쯤까지도 계속해서 게이시의 소유로 된 모든 땅들을 파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었기에 땅이 얼어 수색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노력은 빛을 발했다.
게이시의 안뜰 콘크리트를 깨트리자 경찰들은 또 끔찍한 시체와 마주하게 되었다. 남자는 짧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 남자들 다른 희생자들처럼 어린 소년이거나 젊은 미혼의 남성이 아닌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그의 왼손엔 결혼을 상징하는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일리노이즈 강에서 또 다른시체가 발견되고, 게이시의 집 오락실 밑에서 또 한구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게이시의 사유지에서 발견된 마지막 시체까지 모두 찾게 되고 그 수는 자그마치 서른 두 구였다. 하지만 로버트 피에스트는 계속해서 실종상태였다.
하지만 1979년 4월 피에스트의 시체가 일리노이스 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위에 시체들과 마찬가지고 그의 목엔 종이 타월과 그의 속옷이 쑤셔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게이시의 마지막 희생자인 것이 확인되었다.
1980년 2월 6일 수요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 있는 "Cook County" 형사 법원 건물에서 존 웨인 게이시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게이시는 자신을 비정상인으로 만들어 최대한 사형을 피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네 명의 자아가 있다고 말하며 하나는 사업가, 하나는 정치가, 하나는 자원봉사자, 그리고 살인자라고 했다.
자신은 다중인경의 피해자이며 살인을 하던 자신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최근 밝혀진 사건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 놀랍고 무섭다고 말하며 동정을 호소했다.
하지만, 게이시는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단 한번의 실수를 하게 되는데 자신이 성폭행 한 소년 중 한명을 살려보낸 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제프리 린갈이었는데 그를 법정의 세운 건 다름 아닌 게이시의 변호사였다.
이 변호인은 분명 린갈은 광분한 상태에 게이시와 평상시의 게이시에 다른 면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변호사가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제프리 린갈이 맞습니까?"
"네."
"당신은 저기 앉아있는 존 웨인 게이시를 만나 적이 있습니까?"
그때부터 린갈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시선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재판장은 조금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게이시가 자기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뇨. 그는 악마입니다. 그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통제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린갈의 증언은 오래지속되지 않았다. 린갈은 자신이 게이시에게 강간을 당하는 것을 설명하던 중 심한 공포를 느끼며 강한 스트레스로 인해 구토를 하였고 히스테리칼하게 울어버렸다. 그는 곧 법정 밖으로 나가 안정을 취할 것을 명령받고 그곳을 나왔다.
이 때 게이시는 화를 내거나 혹은 당황스러워하지 않고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이 그저 먼 산을 바라보듯 린갈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변호인 측은 불리해진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게이시의 어머니를 법정에 올렸다.
그녀는 살인마로 변해버린 아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변호했다.
"어린 시절 게이시는 아버지에게 수도 없이 학대를 당했어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모욕적인 언행으로 멍들어있던 아이에게 그 사람은 종종 자신의 가죽벨트를 벗어 그것으로 존을 구석에 몰아놓고 때리곤 했습니다. 그럼 아이는 밤새 잠도 이루지 못하고 침대 구석에서 눈물을 훔쳤어요. 크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답니다. 소리를 내는 날엔 술에 취한 그를 깨웠다는 이유로 또 정신없이 맞을테니까요.
자신의 누나들에게 의지한단 이유로 매번 계집아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여린 마음 탓에 곧잘 울었는데 우는 날엔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맞았습니다. 그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겁니다. 세상에 모든 남자들이 미웠을 거에요. 아니 증오했을지도 몰라요."
그의 대한 정신 감정은 변호인 측과 피고 측의 의학전문가들의 견해가 갈리지 않았다. 그는 다중인격장애를 경험했거나 혹은 반 사회적 습성으로 인해 정신분열 상태였다라는 것. 결론적으로 그들은 모두 게이시가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 동안에는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었다는 판정을 내렸다.
배심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비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죄인에게 사형은 가혹하다고 생각하다가도 6년이나 지속된 그의 살인은 충분히 잔인했고 또 엄청나게 많은 희생자를 발생하게 했다.
하지만 1980년 3월 13일.
존 웨인 게이시의 사형이 확정됨으로써 하늘은 희생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재판 후, 게이시는 사형수의 감방 수감된 동안 지속적으로 글과 그림에 집중했다. 그는 만 통 이상의 편지를 썼고 2천 점 이상의 유화를 완성했는데 그가 가장 좋아하던 그림의 주제는 광대의 초상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일곱 난쟁이나 찰스 맨슨, 데이빗 버코비츠, 제르리 다머 등의 자신과 닮은 살인마들의 초상을 그렸다고 한다.
그가 광대에 집착하는 이유를 잠시 살펴보면,
게이시는 마을의 봉사와 간혹 행사가 있을 때 삐에로 복장을 하고 마을 주민들의 기쁨조 역할을 도맡아 했고, 훗날 교도소에 수감이 되었을 땐 광대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후에 재판에서 그 이유를 묻자 게이시는 이렇게 답했다.
"광대분장을 하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나는 그들과 전혀 다를 것 없는 그들과 융화되는 하나의 "사람"이었어요. 매일 혼자 남겨져 혼자서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됐고, 내가 동성애라는 것에 대한 혐오를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하하하하.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 줄 아십니까? 바로 광대는 살인에서 자유롭다라는 거죠.
내 얼굴을 꾸며 날 알아볼 수 없게 만드니 그 누구도 나의 살인을 알아보지 못할테니까요."
이 발언을 시작할 때 게이시의 표정은 상당히 고통스럽게 시작했다고 하지만 마지막에 살인에 대한 발언을 할 때는 굉장히 냉소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게이시는 이후 1994년 5월 9일 후라이드 치킨과 감자튀김, 콜라, 딸기 쇼트케이크로 마지막 만찬을 즐긴 후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게이시는 기자와 마지막 인터뷰를 가졌는데 그는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이 날 죽인다고 해서 이미 죽어없어진 자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냐. 당신들의 착각은 날 죽게 만들지만, 훗, 두고봐 당신들은 후회할거야. 이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를."
그를 취재했던 모든 기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자그마치 33명을 잔인하게 죽인 연쇄살인마 존 웨인 게이시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범행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고.
게이시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Kiss my ass"였는데 이 말 역시 자신을 죽여봐야 지나간 일들이 되돌려지지 않는다는 취지로 한 말이라고 한다.
게이시는 독극물 주사로 52세의 나이로 그 지독한 생을 마감했는데 그는 다른 사형수들과는 달리 27분이나 걸렸고, 이는 어쩌면 그를 곱게 보내기 싫은 경찰들이 더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치사주사기에 약품들을 응고시킨 까닭이라고 하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환호를 질렀고 그가 감옥에서 그린 그림들은 그가 죽은 후 경매에 붙여졌는데 대부분을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사들여 그가 죽은 교도소 앞에서 불을 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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