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딱딱한 역사의 이야기는 이야기 형태로 반말로 쓰여져요.
조선시대의 자유부인 - 신사임당
신사임당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율곡 이이의 대단한 어머니, 여류화가 등등보다는 단연 "현모양처" 겠지.
물론, 필자 역시 신사임당이 대단한 어머니이며 조선시대를 이끄는 몇 안되는 여인들 중 절대 빼놓을 수 없다는 점엔 당연히 동의를 표하고 있고, 여자에 대한 차별이 심화되던 조선시대에 여류화가로써 평가되는 그분의 삶을 굉장히 존경해마지 않아.
자, 그럼 우리가 조금은 잊고 있고 또한 역사서에 일일이 표기되지 않는 다른 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께.
일단 백과사전에서 말하는 그 분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하자면 다음과 같아.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년 10월 29일 ~ 1551년 5월 17일 사임당 신씨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
조선중기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와,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이며 본명은 인선으로 사임당은 그의 당호이다.
딸 이매창과 아들 이우등은 문인 화가로 명성을 날렸고 동시대의 여성인 문정황후, 정난정, 황진이 등과 비교되면서 생전에도 부덕과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존경받았으며, 사후에도 아들 율곡 이이의 정치적, 학문적 대성으로 전경하는 어머니상의 전형으로 길이 추앙되었다.
그림, 서예, 시 재주가 탁월하였고 성리학적 소양도 있었으며, 십자수와 옷감 제작에도 능했다.
2007년 한국 여성계의 반대와 집단 반발에도 불구, 정부에 의해 5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전격도안되었다.
위키백과 중 발췌 -
백과사전에 나오는 내용은 얼추 다 비슷할거야. 사임당에 대한 일화라던가 그 분의 생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그럼 내가 이 이야기를 시작할 이유는 없어지겠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위인들처럼 말야.
지금부터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내가 근거로 삼는 문헌에 대한 것도 꼭 적도록 할께.
자, 그럼 시작할께.
사임당은 진사 신명화와 용인 이씨 사이의 둘째딸로 태어났어. 사임당이란 태임을 본받으란 뜻의 이름인데, 여기서 태임이란 태강, 태사와 함께 "주 왕실의 세어머니" 중 한명으로 꼽히는 분으로 왕계의 부인이자 문왕의 모친으로 남편을 잘 보좌하고 아들을 잘 길렀는데, 특히 문왕을 회임했을 때, 나쁜 것을 보지 않고 나쁜 말을 듣지 않으며 나쁜 말을 하지 않는 태아교육을 한 것으로 유명해.
아무튼, 사임당은 중종 17년 열아홉의 나이에 세 살 위의 이원수와 혼인하는데 이때부터 우리가 알고있는 현모양처에 대한 조금은 빗나간 역사적 사실들이 생겨.
하지만 또 양처가 아니라고 말하기에도 어색한 부분은 그녀는 단지 19년을 떨어져 살았을 뿐,
같이 살게 되면서부터는 성심성의를 다 해 이원수를 내조하니까 말이야.
난, 그 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여자로써 억압받던 시대에 자유로이 자신의 뜻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분이라고 말이야.
자, 일단 현모양처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께 .
사전적 의미로는 자녀에게는 현명한 어머니, 지아비에게는 순종하는 좋은 아내, 혹은 착한 아내를 뜻해.
과연 그녀가 현모양처였을까?
물론 그녀가 현모라는 것엔 그 어떤 이들도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 필자도 마찬가지고 말야.
문제는 양처라는 부분인데, 난 지금부터 그 부분에 대해 논하려고 해.
어떤 학자는 신사임당의 일대기를 말하며 "만들어진 현모양처"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난 그 부분과는 사뭇 달라.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 현모양처의 완벽한 이상향의 삶은 아니라도 그녀는 최고의 어머니 상이었으며,
지아비에게 복종은 확신할 수 없지만 나름의 내조를 열심히 했던 분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니 말이야.
일단, 신사임당과 이원수가 결혼을 한 것은 이원수의 본가가 있는 서울이 아닌 강릉이라는 것이 좀 특이해.
강릉은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의 처가, 즉 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의 본가가 있는 곳이야.
좀 이상하지? 사임당을 사랑이 크고 사임당을 배려해서 사임당의 처가에서 혼인을 할 수는 있을거야.
그런데 신명화의 처가라니.
이유를 들자면,
사임당은 외가에서 자랐어. 그러니 사실상 처가는 외가였던 셈이지.
오죽헌
현재, 그리고 과거에 유교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결혼한 처자의 거처는 당연히 지아비를 따라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입을 모을거야.
만약 이것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들은 몰상식한 악처로 기록되었을거야.
그런데 사임당은 결혼 후, 이원수를 따라 서울로 상경하지 않아.
율곡이이가 쓴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 율곡은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혼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렇게 이야기해.
"내가 딸이 많은데 다른 딸은 시집가도 서운하지 않았는데 그대의 처만은 내 곁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네."
이 한마디로 사임당은 그대로 외가에서 결혼생활을 이어가게 되지.
한마디로 신명화 본인도 처가살이를 했다는 반증이기도 해.
자, 이쯤되면 사임당은 대체 언제쯤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을까 라는 의문이 생기는데 율곡은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명화가 세상을 떠나자 상심이 큰 어머니는 상을 마친 뒤에야 서울에 올라와 시어머니 홍씨에게 신부의 예를 치렀다"
라고 설명하고 있어. 이는 사임당은 혼인한지 3년이 지난 후 시어머니 얼굴을 처음보았다란 소리가 되는데,
지금 이 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당대엔 얼마나 대단한 일이겠어.
그런데 이 부분을 이해하자면 당대의 결혼 풍습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데, 간략하게 설명할께.
당시는 혼인절차를 둘러싸고 오랜 논쟁을 치르던 시기였는데,
과거 사대부 집안의 혼인의 기본은 바로 "육례(六禮)" 라는 거였어. 좀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해볼께.
육례를 살펴보자면
신부측에서 신랑 측의 혼인제의를 받아들이는 납채가 첫째고,
신랑 측에서 신부 어머니의 성명을 묻는 순서인 문명이 둘째,
혼인의 길흉을 점쳐서 길함을 얻으면 그 결과를 신부측에 알리는 납길이 셋째,
폐물을 주는 절차인 납징이 넷째,
신부 측에 혼인날짜를 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청기가 다섯째이며,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 신부를 맞이하는 의식인 친영이 여섯째야.
근데 친영이란 게 현재의 혼인식이 여기에 해당하는 거거든.
육례란 것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주공이 지은 <의례>에서 '사대부의 론례'에 의거한 것인데, 이게 조선으로 유입되며서 크게 문제가 된거야.
각종 역사사료에서 친열례에 대한 사료를 찾아보면 서로 상반된 내용들이 마구 혼재되어있거든.
신랑이 신부의 집에가서 혼인식을 치르고 한동안 신부집에 기거하는 것이 친영이란 기술이 있는가 하면,
신랑이 신부집에가서 신부를 데려와 신랑집에서 혼인식을 치르고 사는 것이 친영이란 기술도 있어.
"신랑이 혼인 후에도 신부집에 오래 머문다." 라고 하는 서류부가혼이 우리 민족의 오랜 혼례전통이었기 때문에
<의례>나 주희의 주자사례같은 중국식 혼례가 유입되어오면서 혼동이 생긴거지.
오랜 우리의 전통이 무시당하고 바뀌는 것으로 이야기가 모아지니 당시엔 민간의 저항이 심했어.
이는 태종 15년 예조에서 혼인풍습에 대한 보고를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다음과 같아.
"전조의 옛 습속에 따르면 혼인예법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들어 아들과 손자를 낳아서 외가에서 자라게 하고(중략)
본조(조선)에서도 아직 옛 풍속을 따르고 있습니다." -<태종실록 15년 1월 15일>
이건 고구려의 혼인습속이었는데 고구려시대엔 아들은 물론 손자까지 외가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혼인의 풍습이었기 때문인데,
당시에 여성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잠깐 살펴볼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보면 고구려는 신부집 본채 뒤에 서옥(사위집)이란 작은 집을 지어 그곳에 살게 했는데, 신랑은 예물을 가지고 와서 혼인식을 치른 후 서옥에서 아이를 낳고 거주하다가 아이가 장성한 후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아이가 크는 기간동안 신랑은 신부집에 노동력을 제공해야했기 때문이야.
이만큼 여성을 데려오는데 돈이며, 노동력을 제공했기에 당대의 여자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지.
이렇게 풍습과 새로 도입된 제도의 차가 심했기에 유학자였던 세종과 사대부들은 이런 혼인풍습을 전면적으로 수정해.
세종은 재위 12년 12월 김종서에게 "친영례를 조선에서도 오랫동안 실시하지 못했는데, 이유가 무엇인고?"라고 묻자 김종서의 대답은 당대 노동을 하지 않는 사대부 계급의 친영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데, 다음과 같아.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우리나라의 풍속은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만일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라고 명을 내린다면,
그 노비나 의복과 살림살이들을 여자 집에서 모두 준비해야하는데 바로 이것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집이 부자라면 신부를 접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빈자라면 부담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인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자, 이쯤되면 요즘 논란이 마구마구 되고있는 결혼이 왜 이렇게 굳혀졌는지 대충은 설명이 되는 것 같아.
남자들은 여자의 노동력을 집으로써 사들이는거야. 여자들이 고구려시대에 남자의 노동력을 사옥을 지어 사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지.
지금의 결혼 풍속과는 반대라는 점. 우리가 알아둬야해.
아무튼, 세종은 대안을 제시하는데, 그 대안은 다음과 같아.
"왕인 내가 시범을 보이겠다. 따르겠는가?"
이에 세종은 정말로 행하는데 세종실록 17년 3월 4일자에 "파평군 윤평이 숙신옹주(태종의 서녀)를 직접 맞아가니 본국의 친영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기록되어있어.
이미 세종때부터 왕이 몸소 시범을 보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혼인의 제도를 바꾸자하는 노력이 일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임당은 처가에서 결혼생활을 이어갔다는 건 대단히 큰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거지.
더구나 사임당이 이원수와 혼인한 중종17년(1522년)은 세종이 숙신옹주와의 혼인으로 모범을 보인지 이미 87년이 지난 뒤였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더욱 말야.
더구나 세조실록 6년(1460년) 4월 18일자에는 이제 당일로 신부를 데려다가 혼인하는 것이 예법이 되었다는 것이 실렸는데
"왕세자가 세자빈을 그 집에서 친영하였다. 임금이 중궁과 함께 광호문까지 나가서 전송하고 이어서 누각 위로 올라가 세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고 기록되어있어.
사임당이 당대에 처가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성리학을 중시하는 집안의 유례덕분이었던 것 같아.
율곡의 외할머니에 대해서도 <이씨감천기에서> 그는 "외조부인 참판 최응현의 집에서 나고 자랐다" 고 썼으니 말야.
자, 이제 이야기의 본론으로 돌아올께. 너무 길었지.
부친 신명화의 삼년상을 치른 사임당은 1524년 서울로 올라와 처음으로 시어머니 홍씨를 만났다고 이미 서술했잖아.
그녀는 홍씨와의 일면식이 끝난 후 서울에서 함께 기거하는 것이 아냐.
다시 그녀는 홀로남겨진 그녀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지.
이는 율곡의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도 확인되는 내용이야.
"어머니는 갑자년(1504년 1월 29일에 임영(강릉)에서 태어나 임오년(1522년)에 가군에게 시집을 오셨으며 갑신년(1524년)에 한성으로 오셨다. 그 뒤에 임영으로 근친을 가 계시기도 하였고 봉평에서 살기도 하가다 신축년(1541년)에 다시 한성으로 돌아오셨다."
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뜻이야.
"우리 어머니께선 강릉에서 나고 자라셔서 혼인 후에도 계속해서 기거하시다 외할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는 해에 잠시 친할아버지 댁으로 오셨지만 다시 강릉으로 돌아가셔서 1541년까지 사시다가 친할머니 홍씨가 연로하시어 더는 살림을 돌볼 형편이 되지 않게 되서야 서울로 오셨습니다."
와우, 한마디로 19년을 처가에서 살았지. 그것도 시어머니가 아프시기 전까지 주욱 말이야.
신사임당의 작품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들이었어.
그리고 나머지의 이야기들은 나도 남들과 다 같은 이야기들을 알고있어.
대단한 화가, 대단한 시인, 대단한 어머니 등등등.
그 분의 일대기를 존경해 마지 않는 나로써는 그 분의 사뭇다른 혼인 후의 삶이 그 분을 더 존경하는데 한 몫을 한 부분이야.
다들, 유익했길 바래.
+ 사족.
오늘 이야기는 좀 짧아요.
신사임당의 일대기를 쓰고 싶었는데 시간적 여유가 허락하질 않네요.
그래서 조금 아주 의아할 만한 부분만 적었어요.
그럼 다들 즐거운 퇴근길되세요~
'지식정보 > 인물-역사-신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 최고의 난봉꾼 - 충혜왕 (0) | 2022.05.02 |
---|---|
존 웨인 게이시 [ John Wayne Gacy ] (0) | 2022.04.29 |
여태후(呂太后) (0) | 2022.04.28 |
루크레치아 보르자 (0) | 2022.04.27 |
베니체프스키 거트루드 (0) | 2022.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