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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웃는바보]입니다. 꼭 부탁드려요 ㅠ
어우동(또는 어을우동)
사전에 나와있는 말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어우동(於于同)은 조선 성종 때 방탕한 생활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여성. 으로 소개되고있어.
어우동은 출생일은 명확하지 않지만 양갓집 자제로 부친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이고 종실 태강수 이동과 혼인했는데 나중에 천한 신분의 남자를 끌어들여 문란한 성관계를 맺고 이게 발각되서 이동에게 소박맞고는 당시의 여성들처럼 조용히 자숙하며 사는 게 아닌 수십 명의 조관 및 유생들과 난잡한 관계를 가졌고 야사에는 성종과도 관계를 갖는 사이라고 전해지지.
그래서 성종은 그녀의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서 본인이 사약을 내리는 등 극약처방으로 최대한 빨리 이 사건을 해결해버려.
자, 여기까지가 어우동에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 상식들이야.
그럼 난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 사실에 조금의 살을 덧붙여 야사에 소개되는 일화들을 덧붙여 이 글을 완성해볼까 해.
어우동은 백과사전에도 소개될 만큼 대단한 색녀라고 다들 알고있는데 나는 조금 다르게 표현을 해볼까 해. 어우동은 조선 최초로 자신을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고 그것을 표현한(물론 그 표현법이 사뭇 우리가 받아들이기엔 벅찬면에 없이 않아있지만.) 자유로운 영혼. 이라고 부르고 싶어.
그녀는 사대부가의 딸로 태어나 종실가로 시집한 지금으로 치면 스마트한 배운 여자였어.
바로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잖아.
그녀의 아버지도 높은 신분은 아니었지만 숭문원의 관료였으므로 당시 양갓집 규수들처럼 그녀도 시, 문학을 배운 여자였는데 이런 여자가 그 숨막히는 조선시대에서 자유를 외친 여성이란 점은 참으로 주목할 점이라고 생각해. 왜 역사는 이 부분을 간과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녀는 자신이 시집간 집의 노비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비를 하녀복으로 여장시킨 후 놀아났다고 하는데 그 대범함이 이루 말할 수 없지.
당시에 조선에는 남자들이 여자를 집에서 내쫓을 수 있는 일곱가지 사항이 있었는데 이는 손 안대고 코 푸는 겪으로 당시의 이혼을 합법화 한 호랑말코 같은 법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칠거지악"
내용은 아래와 같아.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음이 그 첫째요, 아들 못 낳음이 둘째, 음란함이 셋째, 투기함이 넷째, 나쁜 질병이 있음이 다섯째, 말 많음이 여섯째, 도둑질함이 일곱째이다."
어른 공경이야 유교사상으로 인해 당연한 것이니 그렇다고 해도 당시엔 아들 못 낳는 것도 여자탓 남자가 바람을 펴도 여자탓, 바람 난 여자를 꾸짖어도 여자탓, 병이 걸려도 여자탓이었던 거지.
어우동은 칠거지악의 무려 세번째 조항으로 인해 친정으로 쫓겨나지.
당시 조선에선 가부장제 사회에서 쫓겨난 여자는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사형과 같은 판결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갈 곳이 없는 판국에 먹고살 방법이 있을 수가 없잖아. 그래서 대부분의 여자들은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비참하게 죽어갔었거든. 그래서 조선의 여자들은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삼종지도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
잠시 사족을 달자면,
난 이게 전부 세종과 성종때문이라고 생각해.
너무나도 업적이 높으신 분들이지만 여자알기를 너무 우습게 아셨어.
고려까지는 여자의 신분이 이렇게까지 낮진 않았는데 어째서 여자의 신분이 이렇게 땅으로 바닥을 쳤는가 보면 중국의 유교사상이 들어오면서 부터야.
혼인의 육례를 살펴보면 납채, 문명, 납길, 납징, 청기, 친영을 뜻하는 건데, 이는 주로 신랑 측에서 신부측에게 행하는 예절이었어. 순서대로 보자면 신부측에서 신락 측의 혼인제의를 받아들이면 신랑 측에서 신부어머니의 성명을 묻고, 납징은 폐물을 주는 절차를 말하고 청기는 신부측에 혼인인날짜를 정해줄 것을 요청하는 걸 말하고 친영은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는 의신을 이야기하는데, 이게 조선에 오면서 오랜 논쟁에 둘러싸여지게 돼.
각종 역사사료에 보면 친영례에 대한 사료를 보면 서로 상반된 내용을이 혼재되있어. 뭐냐면 신부의 집에 가서 혼인을 하고 한동안 신부집에 기거하는 것이 고려때부터의 친영인데 요즘처럼 신랑이 신부집에가서 신부를 데려와 신랑집에서 혼인식을 치르고 사는 것이 친영이란 말도 있지.
신랑이 신부집에 모무는 걸 서류부가혼이라고 하는데 이게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이거든.
우리나라의 친영을 몸소 행한 사람은 여러분이 많이 아는 "신사임당" 이야
현모양처로 알려진 신사임당조차도 결혼 후 자신의 아버지 신명화가 돌아가셨을 때 3년 상을 치른 후에야 자신의 시어머니에게 처음 인사를 했을 정도이며, 더구나 신사임당이 시댁으로 거처를 옮긴 시기는 율곡 이이 선생이 3살이 되던 해니까 무려 19년을 처가에서 지냈어.
한마디로 당신들이 믿고 있는 칠거지악과 여자에게 강요하는 순종은 우리나라 예법이 아니라 중국의 예법이라는 사실 꼭 알아두길 바래.
어찌됐듯 어우동은 이렇게 살기를 거부했어.
어차피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가야하는 인생 양갓집 규수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하고 남편에게 쫓겨난 것을 억업에서 해방되는 기회로 활용했어.
[용재총화]에서는 이렇게 전해.
"어우동이 길가에 집을 얻었다."
와우. 시대는 조선이야.
그런데 조선에서 소박맞은 아낙이 친정도 아닌 사택을 본인 혼자의 거처로 삼는다?
이건 지금 시대로 치면 말야 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커밍아웃 정도라고 하면 받아들이기 쉬울까?
위로는 대왕대비부터 아래로는 여종까지 조선에선 최초의 인물이라는거지.
그녀는 이 독립된 공간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육체의 자유도 만끽했어.
어느 정도였나 치면 자신의 남편이었던 이동의 친척뻘인 종친 방산수 이난까지도 그녀와 합방을 했을 정도니 말이야. 이는 당시의 시대상으로 볼 때, '금수(禽獸-날짐승과 길짐승이란 뜻으로 행실이 아주 나쁜 사람을 비유해서 쓰는 말이야.)'에 해당하는 아주 나쁜 행위였지.
[용재총화]에서는 또 이렇게 이야기해.
"방산수가 나이 젊고 호탕하여 시를 지을 줄 알기 때문에 그가 이를 사랑하여 자기 집에 불러 부부처럼지냈다"
와우, 형수랑 부부처럼 지냈대.
글대 용재총화에서 말하는 걸 보면 남자들은 어우동의 뛰어난 미색에 빠져 그녀를 찾은 것도 아니고 그녀의 색기에 놀아난 것도 아니고 그녀가 배운 여자이기에 더 그러지 않았을까? 아마 그들은 그녀를 하룻밤의 상대로 일삼던 기생들과는 다르게 그녀를 존중하고 사랑했는지도 모르지.
방산수의 어우동을 향한 마음은 그가 지은 시로도 잘 표현되는데
일화로 하루는 방산수 이난이 어우동의 집에갔는데 마침 그녀가 봄놀이를 나가고 없는거야. 빈방에 어우동이 입다 벗어놓은 적삼에서 향기를 느끼고는 불현듯 그리워져서 다음과 같은 시로 자신을 달랬대.
"옥물시계 서로 부딪쳐 밤기운을 맑게 깨우는데,
흰 구름은 높은 달을 감아 분명하구나.
한가한 방은 조용해도 그녀의 향기는 남아있어,
이렇듯 꿈속의 정을 그리겠구나."
더구나 어우동은 위에도 말했듯이 시와 문학에 능한 배운 여자라고 했잖아.
그녀는 사회의 금기를 비웃으며 금지된 매력을 한껏 발산했으니 남자들을 노예로 만들는 것에 한몫한 것이 분명해.
더구나 이난은 자신의 팔뚝에 어우동의 이름을 새겨달라고 요청했는데 이게 웃기는 것이 어우동을 자신의 소유가 아닌 자신이 어우동의 소유가 되겠다는 의지를 뜻하는 거였지.
그러나 그게 어디 이난 뿐이었겠어? [성종실록]에 보면 11년 10월엔 박강창과 어우동의 만남이 기록되어있는데 다음과 같아.
"박강창이 종을 파는 일로 어우동의 집에 이르러서 값을 직접 의논하기를 청하니, 어우동이 나와서 박강창을 보고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하여쓴데, 어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기었다."
이난과 다른 점을 찾자면 이난은 본인 스스로 원했다는 것과 박강청은 어우동이 원했다는 것. 그로 그치지 않고 서리 감의향도 이름을 새겼는데 이는 팔이 아닌 등에 해줬다고 해. 그 외에도 전의감이란 인물도 있었어.
하지만 중요한 건 다 어우동 소유의 남자였다는 것.
어우동의 기가막힌 행보는 끝도없는데 그 중 하나 또 눈여겨 볼 만한 것이 [용재총화]에 서술되어있어.
"그녀의 계집종이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하고 거리로 나가서 잘생긴 소년을 끌어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주고, 저는 또 다른 소년을 끌여들여 매일처럼 함께 잤다"
또, 야사에 보면
여종 - 아무개는 나이가 젊고, 또 아무개는 코가 커서 주인께서 가질실 만합니다.
하니, 어우동 말하길,
어우동 - 아무개는 내가 맡고 아무개는 네게 주겠다.
했대.
이걸로 보면 어우동은 여종과의 신분차이를 넘어 동업자로써 그녀와 함께 지냈다는 것을 알수있는 대목이야. 남성들을 서로 분배했을 정도로 명콤비였지.
끝도 없는 일화들이 속속 등장해야하지만 너무 길어. 그 중 몇가지만 더 짚어볼께.
한번은 이런일이 있었어.
어우동은 마음만 맞는다면 자신의 관능미를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는데도 강간을 당한 일이 있는데 그녀를 강간한 인물은 밀성군(세종의 서자)의 종 지거비였어. 지거비는 평소 어우동의 미색을 눈여겨봤었지만 감히 반가의 부인을 범할 수 없어서 기회만 노리고 있었더랬는데 어우동이 자주 집을 나가 뭇 남성들과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용기를 냈어. 어느 날 새벽 어우동이 집을나가려하자 그는 그녀 앞에 나타났지.
"부인이 어찌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떠들면 큰 옥사가 발생할 것이오!" 라고 그녀를 위협한 뒤 강간했어.
웃기지 않아? 강간을 하는 주제가 옥사를 논하며 협박하다니.
남자들의 이런 이중적인 이기심은 끝도 없어.
어우동이 상대한 남자들의 대부분은 종친에서 공신 출신 벼슬아치까지 조선을 지배하는 남성 사대부들이었는데 그들이 만든 것 중에 하나가 불법적인 성관계가 있는 곳에 뛰어드는 것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한 사내들이었어. 한마디로 지들이 만든 법을 비웃고 있는 자색이 뛰어나고 배운 여자인 어우동에게 자신들의 위선적인 행각을 그대로 노출시킨거야. 이 얼마나 우스워.
어우동이 전 남편의 종친을 상대한 건 방산수 이난뿐은 아니었어. 수산수 이기도 있었는데.
[동국세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어.
이기를 만난 날은 단오였어. 이날은 창포뿌리를 깎아 비녀를 만들고 연지를 발라 머리에 꽂아 재액을 물리치는 일을 하고 남녀들이 그네를 많이 뛰고 하는 날이야.
이날 어우동도 단오장을 하고 도성 서쪽에서 그네 뛰는 걸 구경하는데 이기가 그녀의 여종에게
"뉘 집 여자냐? 라고 물었어
계집이 답하길 "내금위의 첩"이라고 하자 이기는 어우동에게 다가가 남양군의 서울 사무실인 경저로 꼬셔 이끌고는 그곳에서 정을 통했어
그 외에도 이시애의 난을 정벌한 고로로 적개 1등공신이며,성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공로로 좌리 4등공신에 책봉된 훈구파 벼슬아치 어유소도 있었는데 어우동에게 반한 어유소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 그를 집으로 불러 조상을 모시는 사당으로 끌어들여 정을 통했어. 뿐만아니라 전 의금부 도사 김휘는 길가의 인가를 빌려서 어우동과 육체의 향연을 벌이기도 했지.
그 뿐이겠어? 우부승지 노공필에 절충장군 김세적, 전 부평부사 김칭, 전 좌랑 정숙지 등 많은 벼슬아치들이 어우동과 육욕을 불살랐지.
자, 이제 막바지야. 힘을 내!
제일 궁금한 건 성종과의 스캔들이겠지?
안타깝지만 야사에서조차 그 부분은 언급이 별로 없어.
다만 당시 조선의 형법으로는 간통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는데 어우동과의 스캔들이 자신에게까지 미치자 성종은 어우동을 극형에 처해 무관함을 보이려 한 것으로 유추돼.
어우동을 사랑했던 뭇 남성들 중 이난 이기와 함께 의금부에 구속됐어. 수사가 확대되자 이 위선적이고 비겁한 사대부의 사내들은 혐의를 전면부인하기 시작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연일 확대되어서 의금부와 사헌부에서는 관련된 남성 벼슬아치들도 모두 구속해서 국문할 것을 요구했는데 성종이 이를 거부하고 박강창 홍찬 등 중인들만 하옥하라고 명령했어. 그럼에도 사건은 계속 확대되고 가려졌던 새로운 사실들이 자꾸만 속속 드러나는거야.
더구나 모든 남성들이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방산수 이난만이 관계를 시인하고, 나아가 그는 어우동에게 중죄를 면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는데 세종 때의 감동(세종 때 검한 유귀수의 딸아자 평양현감 최중기의 아내로 39명과 간통한 창기. 감동에 대해서 역시 곧 다룰 예정)처럼
많은 남성들을 끌어들이는 길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첩경이라는 권유였어.
그러면서 이난 자신이 어우동의 남자들을 전부 불었는데 (어유소, 노공필, 김칭, 김세적, 김휘려, 정숙지등) 이들이 전부 부인한다는 이유로 성종은 석방을 명령했지.
그렇지만 정의는 살아있는 법! 정괄은 성종 11년 8월 25일 임금에게 항소문을 올렸어.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간단히 설명하면.
어째서 고발당한 사람들에게 한차례의 신문조차 없이 다만 김칭, 정숙지 등만 한차례 형신하고 석방하는가, 이난이 조정에 가득한 대소 조관 중에 바로 위의 사람들을 지목한 것이 의심스럽고 통간한 상황을 매우 분명하게 말하니 또 의심스럽고 위의 사람들과 연적의 관계가 아님이 더 의심스러운데 어떻게 가볍게 용서합니까, 제발 끝까지 추문해주시고 엄벌에 내려주세요. 했어.
이로써 어우동을 둘러싼 구하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 패가 갈려서 싸우는데,
조선의 형법으로는 간통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했잖아.
아무리 죽이려는 자의 수가 많다고 해도 세종때 살아남은 감동에 비하면 귀여운 애교수준인 어우동은 사형을 당하고 당시 여자를 겁탈하는 행위에 대한 국법은 사형이지만 지거비는 도형을 속바치도록 한느 가병운 형벌을 받고 끝이나.
한마디로 어우동만 죽고 나머지는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지.
어우동에 대한 성종의 정리는 다음과 같았어.
"지금 풍속이 아름답지 못해, 여자들이 음행을 많이 자행한다. 만약에 법으로써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징계되는 바가 없을 텐데, 풍속이 어떻게 바르게 되겠는가? 엤사람이 이르기를, '끝내 나쁜 짓을 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어우동이 음행을 자행한 것이 이와 같은데, 중전(사형)에 처하지 않고서 어찌하겠는가?" 라며 사형을 확정지었어.
더구나 어우동은 형 확정 당일 사형에 처해졌는데, 이도 참.. 아이러니한 게 당시 조선으ㅜㄴ 만물이 생장하는 춘분부터 추분까지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어. 대역 등의 중죄에만 이를 가리지 않는 '부대시'의 형을 시행했는데 형벌에도 없는 사형을 시키며 당일 집행을 한 것은 극히 예외적이야.
아마 그래서 성종 또한 어우동과 놀아났다! 라는 풍월이 떠돌고 떠돌아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겠지. 드라마 "왕과 나"에서처럼 어쩌면 어우동을 사랑한 성종이 질투해 그녀를 죽였을 수도 있고 말야.
[성종실록]의 사신은 그의 사형을 주장한 김계창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하고있어.
"김계창은 임금의 뜻을 헤어려 깨닫고 힘써 영합하기만 하였다. 소위 '시대에 따라서 가볍게도 하고 무겁게도 한다'는 것이 어찌 율 밖의 형벌을 말함이겠는가? 감히 이말을 속여서 인용하여 중전을 쓰도록 권하였으니, 이때의 의논이 그르게 여기었다"
흑, 죽은 뒤에 의논 자체가 잘못되었다라고 위로한들 살아돌아오진 않아.
그리고 2년 후인 성종 13년 8월 이난과 이기가 유배형에서 풀려난 것을 마지막으로 그와 통정했던 남성들은 모두 석방되었고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삼종지도를 가르치고, 칠거지악으로 여성을 억압하며 극심한 남성우월주의의 나라가 되어갔어.
희대의 섹스스캔들을 불러일으키며 위선적인 조선의 남자들을 손바닥 안에 두고 그들을 가지고 놀았던 요부 어우동.
그녀의 대한 판단은 여러분들 각자가 내는 게 맞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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