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많이 추워진 날씨에 다들 감기는 걸리지 않으셨나요?
요즘 폐렴이 기승을 부린다죠?
전 세상과 거의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밖에 날씨도 쓰레기 버릴 때나 조금 느낄 뿐, ㅎㅎㅎ
아주 오랜만에 인사드리는 [웃는바보]에요. 늦어도 너무 늦었네요. 출산과 육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블로그 포스팅은 제게 그저 사치였어요.
아직 결혼하지 않으신 미혼분들, 꼭 참고하세요.
아가는 저절로 크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와 아빠의 고된 희생이 따라야 크는 것이더라고요. ㅎㅎ
엄마인 저는 밤잠과 건강을 포기해야했고, 아빠인 뚱보는 여가 시간과 건강을 포기해야했죠.
이제 갓 150일을 넘긴 저희 아가는 무럭무럭 자라서 단 100일만에 9키로를 찍는 쾌거(?)를 이뤄냈고요.
저와 뚱보는 노안을 얻는 쾌거를 이뤄냈죠.
이젠 아가도 통잠을 자는 시기가 찾아오고 제게도 꿀같은 휴식시간이 생기니 이런 호사도 누리네요.
언제나처럼 현 포스팅은 이야기하듯 반말로 쓰여집니다.
아참, 부탁드립니다. 출처는 http://blog.naver.com/chlalsdud61 으로 꼭 밝혀주시면 감사하겠고,
글쓴이는 [웃는바보]입니다. 꼭 부탁드려요 ㅠ
자, 그럼 너무 숭고해서 감히 입에 올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유관순 열사" 그녀의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겨레의 빛 [1] 그 이름마저 숭고한 유관순 열사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해 거족적으로 일어난 일명 “3.1 만세의거” 혹은 “3.1 만세운동”으로 불리는 일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몇 있지만 내 뇌리에 깊게 박혀 잊혀지지 않는 이름은 바로 “유관순 열사”야.
요즘 친구들은 삼일절이 그저 쉬는 날로 각인하고 그 날의 의미를 자세히 알려고도 하지 않고, 금요일이나 월요일이서 연휴로 이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이들이 많은 게 사실인데, 우리가 왜 삼일절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하지 않을까?
요즘 교과서에 유관순 열사가 빠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접하는데... 정말 너무 화가 나서 당시 40일 된 나의 아가를 붙들고 유관순 열사에 대해 일장연설을 했던 기억이 나.
물론 아가는 듣고 있어도 무슨 뜻인지 모를 테고, 훗날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앞으로 장난질 쳐진 교과서를 배워야하는 불운한 내 아이에게 정확한 역사를 가르쳐야 된다. 라는 취지로 나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수십 번이고, 반복해서 이야기를 해줄 요량이야.
무튼, 이런 삼일절은 예전 교과서에선 “3.1 만세운동”이라고 표기하곤 했는데
난 이 표현이 사뭇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이 사건으로 인해 구속된 조선인이 4만7000여명, 사망자가 7509명에 달하는데, 이를 그저 “운동”으로 치부해버리면 아주 가벼워지니까 “의거”가 맞지 않을까?
3.1 만세 의거 하면 유관순 열사가 떠오른다고 말했는데 오늘 이야기할 유관순 열사는 그 이름마저 숭고해서 내가 이렇게 서술하는 것이 과연 그 이름에 누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야.
자, 우리의 두산백과에선 그녀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놓았는지 요약본을 좀 볼게.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관순 [柳寬順] (두산백과)
이렇듯 유관순은 일제강점기에 어린나이에 독립운동을 하다 옥중에서 죽게 되지.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생으로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 용두리라는 곳에서 부친 유중권과 모친 이소제의 5남매중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어.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로 한말엔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가였어.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감리교에 입교하고 부친의 훈도 아래 민족의식을 함양해갔지. 특히나 1910년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를 몸소 체험하면서 민족의 처지를 인식하게 되었어.
이런 환경 속에서 1915년 봄에 이화학당의 보통과에 편입하면서 선진 학문을 공부하고 학우들과 금세 친해져서 행복한 나날을 지내고 있었지만 그녀의 가슴에 자리 잡은 민족에 대한 사랑과 긍지는 그 편안함 속에서도 더욱 견고해졌지.
그녀는 종종 학우들에게 “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질 테다.”라고 누누이 말했다고 해.
이렇게 큰 조국애와 민족애는 3.1 만세 의거에서 꽃을 피우게 된 거야.
여기서 잠깐 3.1 만세 의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넘어가 볼까?
요약 :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3·1운동 [三一運動] (두산백과)
두산백과에선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지. 나는 조금 살을 붙일게.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에 입학해서 선진학문을 수용하고 조국애와 민족애를 키워가던 시기는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이하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이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전후 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했기 때문이야.
민족자결주의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말해.
무튼 이 기회를 틈타 우리나라는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때라 일본도 물러날 거라는 기대감 속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계획되었지.
그 중심은 중국 상해에 발판을 두고 있는 신한청년당과 일본 동경에 거점을 두고 있는 조선유학생학우회였는데 국내에서 이 소식을 접한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됐지.
여기서 왜 외국에서 그리고 힘없는 학생들과 종교계 인사만이 이 운동을 추진했는지 의아한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는 한국 민족의 조직적인 독립운동 역량을 제거하기 위해서 꾸준히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감시하고, 고문했기 때문에 그나마 조직을 운영할 수 있었던 종교계와 학생들, 그리고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던 거야.
천도교의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은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 라는 3대 원칙을 수립하고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했고, 기독교의 선우혁, 신민회의 이승훈, 양전백등과 서울의 학생들 중 강기덕, 연희전문의 김원벽, 한위건 등이 전문학교 대표들의 회합을 통해 학교별 대표를 선입해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했어.
독자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던 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 (지금의 YMCA)의 총무인 박희도로부터 천교도와 기독교가 연합하였으니 동참하라는 동지를 받고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회의를 열고 연합 전선에 참가해 3월 1일 탐골공원에 집결하기로 결의하면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 이 모두가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된 거야. 그런데 이 3.1 만세의거의 계기는 바로 동경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다는 건 잊으면 안 돼. 이 또한 후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할게.
거사일자가 3.1일이 된 것은 광무황제 국일장(3월 3일), 당시 일요일이었던 3.2일을 피하고,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서 3월 1일이 된 거지.
그리고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의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이 거행됐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삼세 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식은 끝났지만 탑골공원에 모인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면서 시가지로 물밀 듯 밀려나가 만세 시위를 전개하면서 불꽃을 지핀 거지. 일부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광무황제의 영전에 조례를 올리기도 했고, 또 일부는 프랑스 영사관에 들어가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본국에 통고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미국 영사관 앞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는데 이 날 서울의 만세 의거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 됐지.
자, 여기까지가 3.1 만세 의거에 대한 이야기야.
이 때, 유관순 열사 또한 3.1만세 의거에 참여했는데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 선배들을 통해 이를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생들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결사대를 조직하면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게 된 거야.
조선총독부에서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 휴교령을 반포함으로써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유관순 열사는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교향에 전하고 그곳에서 만세 시위를 추진하기로 하지.
이 때 열사는 부친의 주선으로 감리교 동면 속회장인 조인원과 이백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상의해 만세 시위운동의 구체적 방침을 세워나갔지.
그리고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유관순 열사는 [대한독립만세]라고 적힌 직접 만든 태극기를 모든 시민에게 나눠주다, 정오가 되자 군중 앞에서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놈들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 사람들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당시는 찾읍시다. 라고 표기했었어. 어린 친구들이 읽는다면 다소 생소한 맞춤법일거야.)” 라고 열변을 토해냈다고 해.
이에 장터는 독립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이내 아우내 장터의 독립선언식이 거행되고 유관순 열사를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전개해갔어.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고 사람들에게 독립의 의지를 불어넣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를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나중에는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까지 동원되었다고 해. 학살된 사망자는 무려 19명 부상자는 30여명이었는데 사망자에는 유관순 열사의 부친인 유중권 선생과 모친이 포함되었어. 그것도 유관순 열사에 눈앞에서.
이에 유관순 열사는 숙부인 유중무 등과 함께 주재소로 찾아가 헌병 보조원들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는데 “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라고 하기도 하면서 주재소를 습격할 태세를 보이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해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유관순 열사와 유중무, 조인원과 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해 천안헌병대로 압송했지.
여기서 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헌병 보조원이 한국인이라니. 내 나라를 찾겠다는 동포를 무참하게 칼로 찌르고 죽이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보초가 한국인이라니.
근데 다들 매국노 이완용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거야. 이렇듯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자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고 군에 자원입대하는 이들이 굉장히 많았어. 대부분 독립 후 그 댓가를 달게 받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승승장구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아. 뉴스를 자주 접하는 사람들은 알거야. 어느 당의 대표의 아버지가 독립투사로 포장되었는데 실은 일본 앞잡이였다는 사실, 혹은 어떤 배우의 할아버지가 매국노였다는 사실, 어떤 여가수의 할아버지가 매국노였다는 사실 등등..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독립운동을 전개해 이 나라를 내 나라로, 내 말을, 내 언어와 결을 잃지 않고 살아가게 만들어준 독립투사들의 자손들은 지금 무얼 하고 살고 있지? 우리나라 왕의 자손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지?
정말 아이러니하고 황당한 시대에 살고 있어 우린.
자, 각설하고 다시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유관순 열사가 체포되었다고 했지? 그때 유관순 열사의 나이는 꽃다운 18세였어. 18세.
요즘 우리나라 18세면 고등학교 2학년이야.
고등학교 2학년들은 대부분 학업에 열중하고 자신의 시간도 없이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꿈을 위해, 혹은 부모가 정해놓은 꿈을 위해 잘 시간조차 없이 공부하고 있지.
그들은 가끔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며 요즘 대세인 EXO라던지, 아이콘이라던지, 눈화장, 유행하는 컬러 들을 이야기하고 이른 사랑을 하는 친구들은 밤잠을 설치기도 하지.
그들은 가끔 영화도 보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어른 흉내를 내기도 해. 그
렇게 앞으로 자신들에게 펼쳐질 꿈을 위해 내달음질 치면서 간간히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도 하지.
하지만 유관순 열사에게 그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을 거야.
그녀에겐 친구들과 나눌 미래가 없었고, 나를 지지해주고 지켜줄 나라가 없었어.
오직 그녀에겐 내 나라를 찾는 일. 그것 외엔 모든 것은 사치였을지 몰라.
그렇게 어린 그녀는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 순국을 하게 돼.
자, 이젠 그 과정을 좀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 동작동과 대전 국립묘지(현재의 현충원)에는 애국지사 묘역이 별도로 있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이 이것과는 별도로 또 있어)
그곳에는 일제 강점기에 항일투쟁을 하시다 돌아가신 애국선열들이 묻혀있는데, 그 두 곳 어디에도 유관순 열사의 묘소는 없어.
다만 서울 동작동 애국지사 묘역 추모관에 위패로 안치되어 있지.
왜일까?
그건 유관순 열사의 유해가 없기 때문이야.
그녀가 체포되고 천안헌병대로 압송된 다음 며칠 뒤 공주감옥으로 이송되었는데, 거기서 오빠 유관옥을 만났어.
유관옥은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면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잡혀 온 거였는데 그도 참 대단해.
그는 재판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나라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라고 말했다고 해.
아마 유관순 열사도 이에 더 마음을 확고히 다잡았을지 몰라.
그리고 그해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경성 복심법원에 항소, 유관순열사는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어 다시 서울로 오게 되었지.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징역 3년을 받게 되자 열사는 상고를 포기했어.
기결수 신분으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도 유관순 열사는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했고 급기야 일제는 1평도 안 되는 지하 감방에 가두고는 온갖 고문을 자행했지.
고문 내용은 다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거야.
그 방법이 정말 잔인하고 참혹해서 일본스럽다는 말 말곤 다른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
유관순 열사가 그 어린 나이에 받은 고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고 해.
손톱과 발톱을 뽑는 고문을 시작했어.
위와 호스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뜨거운 물, 변, 다수의 칼날 등을 강제로 투입했어.
입과 호스를 연결하여 물을 강제로 주입하고 이 물들은 온 몸의 일곱 구멍으로 다 흘러나오게 말이지.
그리고 달군 쇠로 음부를 지졌지... 상상이 가? 난 아가를 낳는 고통을 겪은 뒤인데도 상상이 가지 않아. 아가를 낳고 약 2주간 아파서 제대로 앉지도 못할 정도로 여린 그 곳을.. 달군 쇠로 지졌대.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라고 보기 어렵지.
또한, 다른 독립 열사들(특히 남자들) 앞에서 칼로 양쪽 가슴을 도려냈어. 말했다시피 열사의 나이는 꽃다운 18세 소녀였어. 소녀. 하교 후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며, 연예인의 이야기들로 꽃을 피우고 주말이면 예쁘게 단장하고 영화를 보는 하고 싶은 일이 무궁무진한 소녀 말야.
그리고, 면도칼로 귀와 코를 깎아내렸어.
여자로써는 특히 치욕적이라 할 수 있는 성고문들 중 유일하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고문
바로 미꾸라지 고문.
일본의 잔인한 성고문들 중에서도 가장 최악으로 평가 받고 있지만, 일본의 필사적인 은폐작업으로 현재 정식 고문 기록에는 빠져있지.
여기서 잠깐 미꾸라지의 습성을 살펴보면 습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해 구멍이 있으면 들어가려고 하는 습성이 있어. 일본 고문관은 이러한 미꾸라지의 습성을 이용하여 그녀를 알몸으로 독에 가둔 후 물에 미꾸라지를 풀어 넣은 거야. 참 똑똑들도 하지.
18세 소녀가 이겨내기엔 너무도 혹독하고도 잔인했던 고문, 유관순 본래의 얼굴과 고문으로 인해 퉁퉁 붓게 되었지.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유관순의 얼굴은 본래의 얼굴을 잃은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렇게 갖은 고문 속에서도 그녀는 아침, 저녁으로 만세 삼창을 부르며 대한의 독립을 고창하며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게 했지. 그녀에게 독립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 그리고 다른 모든 애국열사들이 그렇게 지켜낸 내 나라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는 나는 과연 내 아이에게 이렇게 나라를 지켜 물려줄 자신이 있는가, 되묻게 돼. 과연 내게 이 나라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무튼, 그렇게 항일 독립을 외치던 유관순 열사는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6월 30일 경성 복심법원에서도 징역3년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형이 확정되었다고 했잖아
. 그러니 유관순 열사의 만기 출소일은 1922년 7월 3일이 되는 건데, 뜻밖에 특사로 형이 절반으로 줄게 되었어.
1920년 4월 영친왕 이은과 방자의 결혼으로 정치범에 대해 사면령을 내렸는데 유관순 열사도 마친 그 사면대상에 포함된 거지.
수형기록표에 적힌 ‘출옥 연월일 1921년 1월 2일’이 바로 이를 말해주는 거라 할 수 있어.
그런데 유관순 열사가 체포된 게 4월 1일이었고 최종 재판으로 확정 형을 받은 일자가 7월 4일인데 이 3개월 남짓 소요되는 시간을 빼면 출옥 날짜는 더 앞당겨지게 되는 셈이어서 이를 계산해보면 1920년 9월 30일이면 형이 만려되는 셈이지.
하지만 유관순 열사는 출소를 이틀 남겨두고 그해 9월 28일 고문 후유증으로 18세의 나이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고 얼마 뒤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으로 인계돼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었어.
하지만 내가 위에서 서술했다시피 유관순 열사는 시신이 없는 관계로 울 동작동 애국지사 묘역 추모관에 위패로 안치되어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추후에 그곳이 군용기지가 되면서 파헤쳐져 열사의 시신이 사라진 탓이라고 하지.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유관순의 시신은 여섯 토막으로 훼손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난 그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아. 이유는 시신을 인수받은 이화학당측의 교우들은 시신을 수습하였고, 이틀 뒤인 10월 14일 오빠 유우석 등 몇 사람만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을 치렀다고 되어있거든.
그 가운데 가장 근거 있는 주장은 이정은 독립기념관 연구원이 펴낸 유관순 열사의 일대기 [유관순]을 살펴보면 수감 당시 간수들이 얼마나 발길로 걷어찼던지 열사의 방광은 파열되었고, 이화학당의 월터 학당장 서리가 서대문형무소 병사로 면회를 가서 보니 열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고, 병색이 완연해 맞잡은 손의 자국이 그대로 눌린 채로 있어 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손가락으로 눌러 만져보니 살이 썩어서 손에 피가 묻어 나왔다고 하며, 월터 학당장 서리가 치료를 요청하였으나 감옥 측에서 이를 거부했다고 해.
그로부터 얼마 뒤인 10월 12일,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들것을 하나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보니 그 들것에는 열사가 붉은 수의를 입은 채 시신이 되어 돌아왔는데, 감옥 측은 열사의 시신을 근 보름간이나 가매장했다가 인계한 거야. 그러니 시신 인계당시 그 상태가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가지만 시신이 여섯 토막으로 훼손됐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아.
책에서는 “장례식을 직접 주관하고 참여했던 이화학당의 월터 학당장이나 오빠 유우석은 시신 절단설을 부정하였다.” 라고 표기되어있어.
그런데 이처럼 유관순 열사의 고문 사실과 그분의 3.1 만세 의거에 대한 자료가 명백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혹 가다 유관순 열사의 항일독립투쟁사는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건 각자의 판단의 몫이기도 하니 유관순 열사가 의심받게 된 이유들을 몇 가지 나열해 볼게.
첫째. 유관순 열사의 옥중 사진을 보면 유관순 열사는 기혼여성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는
둘째. 유관순, 그녀는 정치적 종교적 목적으로 만들어낸 인물
셋째. 이화학당 출신 인사의 친일 행적 은폐 의혹
넷째. 토막살인 루머 논란
그로인해 유관순 열사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 특히 항일독립투쟁가에서 빠진 채 교과서가 편찬되기도 해서 논란이 지속되기도 해.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니 여러분들이 맞다 틀리다를 정하면 될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해.
유관순 열사가 만약에 누군가의 필요로 만들어낸 인물이라 해도, 다만 이름이 유관순이 아닐 뿐, 그분처럼 죽어간 사람들이 그날 하루만 해도 7천 500여명이라는 거. 그리고 옥중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이가 수도 없다는 것. 그렇게 그들의 피와 비명이 겨우 지켜낸 나라가 바로 이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것.
그 이름이 유관순 열사이든, 아니든 그게 과연 중요할까?
난 그저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숭고한 목숨을 아낌없이 바쳐 얻어낸 독립된 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자긍심을 가지고 살만 하다고 생각해. 내 아이에게도 꼭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고.
마지막으로 유관순 열사의 유언을 끝으로 이 포스팅을 마무리 할까 해.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은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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