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정보/인물-역사-신화

이동식

알콩달콩아빠 2018. 1. 10. 00:35
728x90
반응형
Your Title Your Body :)

안녕하세요. 와우, 너무 늦었네요.


부탁드립니다. 출처는 http://blog.naver.com/chlalsdud61 으로 꼭 밝혀주시면 감사하겠고,

글쓴이는 [웃는바보]입니다. 꼭 부탁드려요 ㅠ


큰걸음으로 저희 앞으로 불쑥 찾아온 봄날씨에 조금 나른한 하루를 보내고 계실텐데요.

감기 조심하세요.



현 포스팅은 언제나처럼 이야기하듯 반말로 쓰여집니다.


자, 그럼 '죽는 순간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라고 말한 싸이코패스 사진작가의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모든 사진은 사실적으로 찍혀야한다. - 싸이코패스 사진작가 이동식.


 


 


 


세상을 살다보면 남들과는 다른 것에서 매력을 느끼는 이들을 종종 발견하곤 하는데,


우리는 그들을 그저 나와는 다른 개성을 가진 이들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기곤 해.


 


그런데 개성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잔인한 사상을 가진 이가 있었는데 그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인간이 죽어가는 과정.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어.


 


언제나처럼 우리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에선 그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볼께.


 


 


사진작가 죽음 연출 사건은 아마추어 사진작가이자 보일러 배관공으로 일하던 이동식(李東植, 당시 42세)이 단골 이발소에서 만나 애인이 된 여성 면도사를 상대로 죽어가는 모습을 찍기 위해서 독극물로 살해한 사건이다.


붙여넣기 ㅇ_ㅇb


자, 그럼 이 미친 사진작가이며 보일러 배관공의 어린시절부터 차근차근 살펴보자.


 


이동식이란 인물의 어린시절은 거의 대부분의 연쇄살인마 혹은 싸이코 패스들의 어린시절처럼 정말이지 너무나 불우했어.


그가 6살이 되던 해 그는 부모를 한번에 잃었고, 대구에 살던 자신의 숙부에 집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그의 불행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고 해.


 


그의 숙부는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14세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할 때까지. 그러니까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에 무작정 가출을 하기 전까지 잠을 편하게 자본 적이 없다고 해.


그의 숙부는 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부터 구걸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 밥값을 하라고 채근하며 폭력을 행사했고,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잘못을 하는 날엔 발가벗겨 길거리로 몇시간이고 내쫓기도 했다고 해.


 


뚝딱하면 이어지는 폭력과 잠을 자지 못하는 고문을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이동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무작정 서울로 도망쳐나왔지.


아마 나처럼 용기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라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Yes야.


무작정 나오기는 했지만 본인이 살던 대구도 아닌 연고지 전혀 없는 서울에서 당시 어린 아이에 불과한 그가 무얼할 수 있었을까?


구두를 닦거나 구걸을 하게 되겠지. 그 시절엔 그런 아이들로 서울역이 북적북적했다고 하니까. 


그렇게 그는 넝마주의를 했다고 해. 약 15년간 말야.


 


어쩌면 아무런 재주도 없고 돈도 없던 그가 범죄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르지.


한평생을 배부르게 먹어본 적도 마음 편히 자본 적도 없던 그는 1963년 당시 24세에 나이로 특수절도 혐의로 징역 8개월을 복역하게 되고,


1년 뒤인 1964년 또 한번 특수절도 혐의로 1년 6개월 등 각종 범죄로 전과 3범이라는 대단한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지.


 


이동식은 또한 두번의 결혼을 했는데, 첫번째 부인과 언제 결혼을 했고, 언제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두번째 결혼이 1975년이었으니 그 전인 건 확실해.


더구나 이동식의 첫째부인은 실종되었어. 이 이야기는 밑에서 차차 이야기하자.


 


1975년 두번째 결혼을 한 그는 두번째 부인과 2남 1녀를 두고 겉으로는 행복한 결혼생화을 하게 되는데


그는 결혼을 하면서 보일러 배관공으로 취업해 기술을 익히고 우연한 기회에 사진을 접하게 되면서 다소 자극적인 소재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 그의 초기에 사진들은 그냥 평범한 사진에 불과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찍게 된 "닭이 죽어가는 과정" 을 찍은 사진이 대회에서 수상하면서(은상이었어!) 그의 사진은 점차 '엽기'적으로 변하게 돼.


 


수상 이후 그는 특별한 주제를 찾지 못해 고전을 하게 되면서 점차 누드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돼.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두번째 부인에게 누드 모델을 부탁하며 다소 엽기적인 주제들의 사진을 요구했어.




사진 밑에도 간략한 코멘트가 있지만 위의 사진은 자신의 부인을 상대로 찍은 사진이야.


범행사진은 아닌 이 사진이 증거로 채택된데는 많은 이유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그의 과도한 집착이 만들어낸


변태적인 요구들의 이유가 가장 큰 이유였지.


 


두번째 부인은 전처소생에 아이까지 품을 정도로 품행이 단정하고 순진했다. 고 경찰들은 말해.


그런 부인을 상대로 이동식은 어마어마한 요구들을 하는데,


그 요구는 포르노에서나 다룰 법한 요상한 것들이었어.


일단 부인이 체모란 체모는 모두 밀어버리는 것은 물론, 변태적인 성행위를 하는 장면이나,


(간혹 그는 그의 부인이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갖으라 요구한 뒤 그것을 몰카의 형식으로 담아내기도 했어.)


부인의 질속에 이물질을 넣어놓고 그 부분을 클로즈업해 찍어내기도 했어.


그리고 자신이 찍어낸 사진들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행복해했다고 해.


 


그렇게 그는 누드사진작가로의 활동을 시작했어.


이 즈음되면 그의 부인은 그를 버텨내기 힘들어지기 시작하지.


하지만 너무 신기한 게 그의 부인은 그의 작품활동의 모델이 되는 일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했어.


그리고 든든한 그의 지원자였지.


 


그때부터 그의 광적인 엽기사진에 대한 집착이 심화되기 시작하는데


누드모델들에게 잔인하게 변장을 시키고 죽어가는 모습을 연출하게 하여 그 모습을 앵글에 담았어.


하지만 이는 꽤나 인위적인 모습이었으므로 그가 만족할 만한 사진을 건질 수 없었지.


 


그는 이미 닭이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사진으로 담아내는 과정에서 전해지는 생생한 죽음의 선율을 느꼈기 때문이야.


그는 자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자 '진짜'를 찾아 헤매이기 시작해.


우연한 기회에 그는 직접 목을 메 자살하는 이를 찾아가 그 얼굴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눈에 핏줄이 터지고, 고통에 몸부림을 치는 모습과 서서히 죽어가며 혀를 길게 내빼며 마지막 세상과 이별하는 모습들을 사진 속에 담게 되지.


 


지금처럼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지 않은 시절에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기란 여간 쉽지 않았어.


'진짜'를 맞본 그의 광기는 이제 단순한 갈망으로 끝나지 않아.


그는 '진짜'를 만들기로 결심했어.


 


그리고 1983년 새해 벽두부터 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그의 엽기 행가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기 시작해.


 


1982년. 이동식은 단골로 드나들던 퇴폐업소인 이발소에서 '진양'이라는 예명으로 일하던 여인과 내연의 관계를 맺게 돼.


당시 그가 드나들던 이발소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하자면 이발소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은 속옷을 입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어. 그녀들은 손님들의 면도가 끝나면 자연스레 커튼이 쳐진 곳으로 손님들을 이끌었고 그곳에서 돈이 오고갔으며 성이 오고갔어.


 


이동식은 언제나 한 여인만 고집했는데 앞서 마한 '진양'이라는 김씨 성을 가진 여인이었어.


그녀는 24살에 젊은 여인이었고, 이동식과 내연의 관계였다고 해.


그녀와 이동식은 이발소가 아닌 곳에서도 종종 관계를 맺어왔고 수시로 데이트를 즐겼어.


 


그는 그녀와 데이트를 하는 날이면 의례 그녀를 향해 일명 '뻐꾸기'를 날려대는데 그걸 잠시 나만의 방식대로 대화체로 살펴볼께.


 


"이 생활 지겹지 않아? 너 정도면 말야, 이렇게 동네 이발소에서 썩을 인물이 아냐. 너의 이 아름다운 몸을 좀 봐."


 


"그렇지만 누가 나따위에게 관심이나 갖겠어요? 작가님이나 되시니 저를 값어치있게 만들어줄 뿐이죠."


 


"그렇지 않아. 넌 일약 스타가 될 정도의 매력을 가지고 있어."


 


"무슨 말씀이세요?"


 


"나와 함께 일하자. 내가 널 돈방석에 앉혀줄께. 누드모델을 해보는 것이 어때?"


 


"제 발가벗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는 말인가요? 아뇨. 그건 하지 않겠어요."


 


진양의 단호한 거절에도 이동식은 포기를 몰랐어.


그는 지속적으로 그녀를 찾았고 그녀를 찬양하며 그녀에게 지치지 않고 누드모델 제안을 했어.


마침내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던 날. 1982년 12월 14일 그들은 서울 금천구의 호암산으로 향했어.


 


출발하기 전 그는 사전에 따로 준비한 것이 있었는데 


약국에서 캡슐에 들어있는 감기약과 드링크제 그리고 청산가리였어.


 


그는 감기약의 캡슐을 벌려 그 안에 들어있는 가루약을 전부 쏟아낸 다음 청산가리를 대신 채워넣었지.


그리고 그는 낙엽이 즐비한 곳으로 사진촬영을 시작하기 전 그녀에게 감기약으로 둔갑한 청산가리와 드링크제를 건냈어.


 


"진양, 당신이 감기라도 걸리면 내가 마음이 아프잖아. 이거라도 마셔. 감기 걸릴까봐 당신을 위해 내가 사온거야."


 


진양은 아무런 사심없이 그것을 건네받았고 이내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어.


캡슐이 녹고 점점 처산가리가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기 시작하자 그는 미친듯이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어.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고 이동식은 신이 들린 것처럼 셔터를 누르고.


이 괴기한 장면은 그녀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녀가 죽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어.


그녀의 숨통이 끊어지자 그는 그녀의 손을 묶고 그녀의 상반신을 한꺼풀씩 벗기기 시작했고,


그만큼 이동식의 사진기에 기록되는 사진들이 늘어갔지.


 


자, 이 일이 있고 얼마 뒤인 1월 18일.


동네 꼬마들은 병정놀이를 하면서 산으로 올랐어. 2:2로 편을 나눠 서로의 편을 향해 총싸움도 하고


서로를 체포하면서 자신들을 몸을 잔뜩 웅크리기 위해 나무 뒤로, 덤불 사이로 숨어들던 녀석들은


평소에는 보기 힘든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차갑게 식어버린 나체의 여성이었지.


 


이 사건은 증거는 물론, 증인 또한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로 '프로파일링 기법' 이 도입된 사건으로도 유명해.


 


우선 경찰은 사체의 부검을 통해 여성의 신변을 파악했어. 그녀는 위에서 설명한 퇴폐영업소인 이발소에 일하는 여성으로 밝혀졌고,


그녀의 주변이 파악되었어.


우선 경찰은 그녀의 단골 손님들을 위주로 조사를 하던 중 이동식과 그녀의 내연관계에 집중하게 돼.


그녀가 없어지던 날,


그녀는 이발소에 이동식과 함께 사진촬영을 위해 멀리 나가기 때문에 오늘은 출근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화를 했기 때문이지.


 


" 목소리가 한 껏 들떴어요. 곧 모델이 되는 행운을 거머쥘지도 모른다고 했었어요.


아, 그 남자요? 거의 매일 출근을 하다시피 했죠. 항상 진양만 찾았어요. 다른 여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어요.


무엇으로 꼬셨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늙은이를 진양도 잘 따랐어요.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돈 많은 사람이 이런 곳 오겠어요?


좋은 곳으로 가서 젊고 배운 여자들 주무르겠죠. 그렇게 이야길해도 진양은 곧 모델이 될 것 같다며 좋아했어요.


아, 그러고보니 그 날 이후, 그 사람 이곳에 안왔어요. 네. 그랬네요."


 


이제 경찰은 확신에 차서 사진작가 이동식에 대해 조사를 했어.


그리고 그의 집을 급습했지.


이동식은 자신의 집에서 붙잡였어. 그는 당시에 멀뚱멀뚱한 얼굴로 경찰을 맞이했는데,


이미 특수절도, 횡령 등으로 전과 4범이었던 그가 순순하게 살인을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건 경찰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간 압수수색 영장은 크게 도움이 되었지.


 


경찰은 그의 집과 보일러가게를 샅샅이 뒤졌어.


처음엔 경찰들을 메롱메롱 비웃기라도 하듯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의 일터 보일러가게 안 깊숙한 곳에 자릴 잡은


후미진 곳에서 결정적 단서이면서 충격적인 물증을 건졌어. 그렇게 수사는 급물살을 타게 되지.


 


결정적 단서는 암호화된 그의 일기장과 이 사건의 중심인 진양의 사진이었어.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여성들의 충격적인 나체 사진과 그의 아내의 비정상적인 나체 사진들도 다수 발견되었지.


그런데 명확한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말야 사건은 또 다른 국면에 부딪히게 돼.


 


경찰의 심문에 이동식은 초지일관 '나는 모르는 일' 이란 대답만 해댔고,


누군가 자신을 위해하려고 자신의 일터에 이런 저급한 사진들을 숨겨놓은 것이라며 반박했기 때문이야.


그는 자신의 아내의 사진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사진들을 다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어.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발뺌하는 겁니까?"


"아, 글쎄 나는 평범한 보일러공일 뿐이오. 어떻게 내가 그런 사진을 가질 수 있겠소?


더구나 내 가게엔 수시로 많은 사람들이 들락이는 곳이에요.


누가 내 가게에 이런 사진을 버리고 갔는지 내가 알게 뭐요?


원본을 찾아요 원본을 가진 사람을 찾는다면 그가 범인일 것 아니오?"


 


당시 그를 심문했던 서경위란 분은 그를 전형적인 "싸이코패스"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한번도 흐트러짐을 보인 적 없으며 반성은 커녕 오히려 그 순간순간을 즐기고 있었다고 해.


거의 방관자 혹은 시청자같은 모습으로 말야.


 


그런 그가 그의 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증인이 나타나면서 그는 백기를 던졌어.


 


가만히 보면 이런 흉악범들의 행동양식을 보면 꽤나 머리를 쓰는 지능적인 놈들을 여럿 만나게 되는데,


이동식 역시 그런 놈들 중 하나였던가봐.


그는 자신의 동네에 자리 잡은 사진관에서 사진을 현상하지 않았던거지.


집에서도 꽤나 멀리 떨어져있던 사진관에서 사진을 현상하곤 했고, 자신에게 이상한 눈초리를 한번이라도 보내는 곳이라면


과감하게 사진관을 옮겼어. 그랬기때문에 그의 행적이 쉽사리 밝혀지지 않았던 것인데,


그의 사진을 인화했다는 사진관 직원이 나타난거야.


 


"처음엔 누드를 찍는 3류 사진사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점점 이상한 사진들을 가지고 왔어요.


연출인 사진인 것은 분명했지만, 뭐랄까.. 사진에서 살의가 느껴지는 그런 것들요.


어느 날 한번은 여성이 피를 흘리는 사진을 현상하러 왔는데 그의 얼굴이 상당히 상기되어있었어요.


그리고 그 사진들은 이상하리 만치 사실 같았어요. 정말 사실처럼 느껴졌어요.


여태까지의 인위적인 것들과는 달랐어요. 정말 섬짓했어요. 말도 못해요. 그 섬짓함은.


그 전까지의 사진들은 여자들이 길다란 눈썹을 붙이고 짙은 화장을 한 미인들이 억지 표정을 지으며


하나 같이 연출이란 걸 단박에 눈치챌 정도의 사진들이었거든요.


아니면 여성의 신체 일부를 클로즈업해서 찍은 사진들이거나 말이에요.


그런데 그건 뭐랄까..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찍은 것이랄까요? 섬짓했어요.


그날 잠을 설칠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그의 진술에 이동식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죄를 인정했어. 그리고 그를 담당했던 당시의 담당 형사 서경위를 불러 그가 말하던


'원본' 의 출처를 이야기해주었지.


 


"가게 지하로 가보세요. 거기엔 숙직실이있어요.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내가 이 방면으론 최고라는 것을 입증해야할 것 아닙니까?


숙직실에 가면 정면에 보이는 곳에 합판으로 막아둔 곳이있어요. 합판의 두께는 얼마 안되니 금방 뜯을 수 있을 겁니다.


한 10cm되려나? 그곳에 보면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 그리고 내 인생 최고의 걸작."


 


그의 말대로 숙직실 합판을 뜯어내자 그들이 찾는 사진의 원본이 벽에 잔뜩 붙어있었고,


필름들도 고스란히 보존되어있었어.


 


진양이 죽어가는 과정을 담은 사진을 당시에 사진학계의 최고의 권위자였던 신구대의 홍순택 교수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어.


 


"사진은 정말 시간 순으로 찍은 것들이 맞습니다. 고통이 찾아드는 시기를 시작으로 순서를 먹여가며 나열한 결과


여기 보이는 16번까지는 그래도 피해자의 숨통이 끊어지기 전으로 예상이 되고, 17번부터 보이는 나체로 변하는 과정을 담은


사진은 이미 피해자의 숨통이 끊어진 후 찍은 것들입니다. "


 


그런데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서경위는 이 싸이코적인 행위를 행한 이동식의 살인이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


이동식의 살인은 너무나 철저했고, 살인에 대한 회의감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지.


 


그는 그의 여죄를 찾기 위해 암호로 가득한 그의 수첩을 해독하기 시작해.


그의 수첩은 일기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동안 자신의 행적을 고백해 놓은 암호형태의 것이었어.


 


그걸 토대로 그를 심문하자 역시 그의 여죄들이 줄줄이 쏟아져나오게 시작해.


일기에 밝혀진 인물만 진양을 제외하고 21명의 희생자가 더 있었어.


그 중엔 오랫동안 행방불명된 그의 전처도 포함되어있었지.


 


그의 일기를 해독하면 할 수록 충격적인 것들은 점점 더 쏟아졌는데,


그 중엔 시체들을 처리한 방법에 대한 것도 있었어. 대체적으로 이동식은 살인을 저지른 후, 사체를 토막내어 처리했다고 쓰여져있었어.


서경위는 그에게 이유없이 죽임을 당한 불쌍한 영혼들의 시체라도 찾아 영혼이라도 달래주고 싶었기때문에


여죄를 끊임없이 추궁하고 사체가 묻힌 장소들을 찾느라 노력했지.


 


하지만 이미 전대미문의 잔인하고 싸이코적인 살인사건에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해외토픽까지 된 이 사건을


더 파헤치고 문제삼고 기사화가 되는 일이 국가적인 망신이라고 생각한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셨던 '윗분' 들께선


빨리 이 사건을 종결하라는 압박을 가해왔고, 그로 인해 이동식의 살인사건은 단 1건만 인정이 되었지.


 


그리고 정말 그의 사건은 날개를 돋힌 듯 재판 또한 빠르게 진행되었지.


그는 단 1건의 살인죄가 인정되었고, 계획적이고 수법이 잔인한 살인사건으로 인해 '사형' 이 확정되었고,


사형 집행은 그의 재판과 마찬가지로  'LTE' 급으로 범행이 일어난지 3년 만인 1986년 6월 형장의 이슬이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으니


내 맘대로 '형장의 곰팡이' 로 사라져갔어.


 


그리고 훗날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에게 셔경위는 이동식이 검찰에 송치되어 가면서 넘겨줬다는 부적이라는 이름의 무언가를


보여주며 말했다고 해.


 


"이건 이동식이 내게 월남전에 파병되었을 때 자신을 지켜준 것이라며 제게 주고 간 것인데.. 이것 또한 사람의 신체 일부인 것 같아 저는 이것을 서랍 깊은 구석에 쳐박아두었습니다."


 


그것은 열쇠고리에 매달린 손가락 한마디만한 장식품이었는데 생긴 것이 꼭 사람의 귀를 잘라놓은 모양이었다고 해.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