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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최고의 척준경

알콩달콩아빠 2022. 8. 8.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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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가전사] 조자룡과 관우와 장비 합쳐 놓은 듯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무용(武勇)을 떨친 사람이라면 누구를 꼽겠어? 전략가로서의 장군 말고 실제 전장에서 자신의 힘으로 전세를 바꾸고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창출해 내고 영화같은 일을 서슴없이 해 내는 일당백의 용장이라면?

이성계? 이성계도 대단한 사람이긴 했지만 최소한 무예와 용기 차원에서라면 내가 생각하는 이 사람 앞에서 눈을 내리깔아야 할 거야. 김유신? 화랑 시절에 낭비성 전투에서 활약한 정도를 제외하면 최전방에서 칼싸움한 거 같지는 않고. 강감찬? 이야기한 적 있지만 칼 들기 버거웠을 문신이었고. 이순신? 일본군하고 칼 맞대고 전투한 적은 없으실 거야.

하지만 1108년 3월 30일께 동북 9성을 쌓은 뒤 어깨에 잔뜩 힘 주고 개경으로 개선한 윤관 장군 옆에 버티고 서 있었을 이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우리 역사 최강의 무장이야. 그 이름은 척준경. 삼국지로 치면 조자룡과 관우와 장비를 뭉쳐 놓은 것 같고 그리스 신화로 치면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스를 모아 놓은 것 같다고 하면 에이 뻥치지 말라고 혀를 내밀겠지?그럼 들어 봐.
이 사람은 황해도 곡산 사람이야. 좀 다른 얘긴데 ‘곡’자 붙은 동네는 좀 팔자가 센 것 같아. 골짜기 많고 산간 지대라는 뜻이니 살기에 척박하지 않았겠어? 심지어 요즘도 ‘곡’자 붙은 동네는 사연이 많잖아? 지도를 보면 이 곡산은 평안남도 강원도 함경남도와 접하는 황해도의 맨 변두리다.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지대고. 이 척박한 동네에서 척준경은 자랐어. 귀족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읽고 쓰기를 배우지 못했지만 그는 힘이 장사에 싸움에 능했고 군인으로 풀리게 된다.

국사 교과서에서 ‘별무반’을 배웠을 거야. 여진족이 흥성해서 고려에게 대드는데 고려군이 패한 뒤 “우리는 다 보병인데 저들은 기병이라 상대가 안됩니다.“ 하여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 (다음 중 별무반이 아닌 것은? 에 몇 번 틀린 뒤 지금까지 기억하는)의 17만 별무반을 조직하여 여진족을 들부수고 동북 9성을 쌓았다고 하지. 척준경은 이 와중의 최전방에 있었어.

여진족이 처음에 고려를 괴롭히기 시작할 때 동북면 병마사는 임간이라는 사람이었어. 이 사람이 여진족을 얕보고 준비도 안된 군대를 출진시켰지만 참패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아.고려 동북면의 거점이던 정주성도 함락 위기에 몰리는데 이때 척준경이 펼친 활약을 보자.그는 갑옷 입힌 말 한 필과 무기를 들고 단신으로 여진족 기병대에 돌진해.

아마 여진족은 웃었을 거야. “고려 애들도 말 타는 애가 있구나 깔깔.” 그런데 척준경은 그 웃음과 창날을 뚫고 기병대 속으로 뛰어들어 여진족 지휘관의 목을 쳐 버린다.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 저놈 잡아라! 여진족 100여 명이 일시에 척준경을 쫓아갔는데 척준경은 숲속으로 요리조리 빠져들어가서는 추격하는 여진족 장수를 향해 활을 겨눈다. 쐐액. 빈틈없이 화살이 꽂혔고 여진족 장수는 땅에 떨어져 버르적거리는 신세가 된다.

임간의 뒤를 이은 윤관이 싸워 봤지만 현실은 이미 역부족이었지. 여기서 고려의 절치부심이 별무반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복수를 위해 고려군이 동북면으로 출동할 즈음 척준경은 감옥에 갇혀 있었어. 무슨 죄인지는 모르지만 원래 배경 없는 사람이 세운 공훈은 화가 되기 쉬운 법이지. 하지만 윤관은 척준경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를 풀어주고 여진 토벌군의 일원으로 삼아.

이 선택은 윤관 자신과 고려군을 구했어. 고려사 기록만 봐도 척준경은 거의 초인적인 활약을 해. 완강히 농성하는 여진족의 석성을 공격할 때는 성벽을 혼자 기어올라가 성벽에 붙어 있던 여진족들 수십 명을 죽이고 성을 함락시키는 대공을 세우지. 거의 <반지의 제왕>의 레골라스나 아라곤 급의 위용.

여진족의 저항도 완강해서 한때 윤관의 지휘부가 습격을 받아 전멸 위기에 처할 때가 있었어. 이때 가까스로 척준경의 부대에 연락이 닿아 척준경이 달려왔으나 중과부적. 포위망은 뚫리지 않고 자신들마저 위험해진다 싶자 동생 척준신이 소리쳐. “형님. 놈들이 너무 세요. 우리마저 죽겠소. 쓸데없이 죽을 일이 뭐 있소.

모르긴 해도 척준신은 쌈박질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속임수나 써서 여진족들 부아나 돋군 (윤관은 여진족을 속인 다음 뒤통수 치기를 무척 잘했어) 이 귀족 나부랭이들이 싫었는지도 몰라. 지나치기만 하면 자신의 뒤통수에 무식한 놈들 소리를 꽂아박던 높은 놈들을 위해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가 뭐냐 싶었겠지.

하지만 척준경은 또 우직한 무장이었어. “너는 살아서 아버지를 봉양해라. 나는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의리상 가만 있을 수 없다.” ‘나라에 몸’ 따위 제치고 척준경의 말은 이런 뜻이었을 거야.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윤관 도원수에게 의리가 있어!

그는 10여명의 부하들을 모은다. “목숨을 걸 놈만 나와라. 나와 함께 죽자.” 이렇게 죽기살기로 뭉친 열 명의 결사대와 함께 그는 1천명의 여진족을 향해 돌진한다. 영화도 이런 영화가 없지. 그러나 분명한 정사의 기록이야. 척준경과 그 결사대가 휘두르는 칼에 여진족이 우수수 쓰러지자 여진족들이 아우성을 치며 물러선다. “이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해.

그렇게 척준경은 윤관의 생명을 구하고 고려 군대를 구한다. 이때 윤관은 펑펑 울어. 죽을 목숨이다 염불을 외우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누군가 자신을 구한 느낌이었겠지. 울먹이면서 윤관이 말한다. “나는 평생 너를 아들로 대하겠다. 너는 나를 아버지로 여겨라.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동북 9성은 여진족의 압박으로 지켜지지 못했어. 그러나 그 전쟁이 결코 헛되지 않은 이유는 여진족이 척준경으로 대변되는 고려군의 매운 맛을 톡톡히 봤던 데에도 있을 거야.

그 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고려가 대충 고개만 숙여 주면 아무런 시비도 걸지 않았고 전쟁을 도발하지도 않았고 고려에서 누군가 반역을 해서 금나라로 도망가면 그 멱살을 잡아 넘겨 주기까지 했어. 중국 대륙에서 그 정도 세력을 떨친 정복 왕조가 한반도를 양순히 내버려 둔 건 금나라가 유일해. 아마 그들의 뇌리에는 사람도 아닌 것이 짐승도 아닌 것이 혼자서 성벽 기어올라 수십 명을 날려 버리고 열 명으로 천 명을 향해 돌진하던 한 고려인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지.

척경입비도, 여진족 정벌 후 국경비 세우는 장면 (17세기 민화)

척준경은 무식했지만 멍청하지는 않았어. 무슨 말인가 하면 금나라가 서고 사대를 요구해 왔을 때 척준경은 “금나라와 척 지지 말자”고 주장한 거지. 보통 척준경 정도 되면 “그 자식들 별 거 아닙니다.” 하고 큰소리를 치는 게 자연스럽지만 그 역시 여진족을 알았던 거고, 허리 한 번 굽히면 될 일에 수만 명의 목숨을 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아는 전쟁을 아는 장수였던 거지.

그의 후일을 보면 좀 안스러워. 그는 그저 군인이었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했어. 이자겸의 밑에 있을 때는 이자겸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고 심지어 궁궐을 태워먹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지. 그래서 그는 고려사에도 반역자 리스트에 들어 있어. 하지만 왕이 밀사를 보내 “자네가 이럴 수 있나”라고 꼬드기자 또 거기에 고개를 끄덕여 이자겸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왕을 호위하고 나오는데 이자겸의 군대가 달려들었지. 이때 척준경이 나서서 벼락같이 호통을 치자 이자겸 군대가 ‘동작 그만’ 돼 버렸다고 해. “내가 척준경이다. 나설 놈은 나서 봐.” 장판교의 장비 정도는 저리 가라 할 포스.
대공신이 됐지만 그는 정치를 몰랐고 어떻게 사람들을 속이고 구스르고 둘러치고 메치는 방법을 몰랐어. 곧 그는 임금으로부터 배신을 당하지. 궁궐을 태운 죄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탄핵을 받아 척준경은 벼슬을 잃고 귀양가게 되는 거야.

하지만 임금도 마지막 배려는 포기하지 않아서 귀양지는 고향 곡산이었지.고향 곡산에 이르는 비탈길을 걸으면서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 무지렁이로 태어나 감옥에 갇혀 죽을 때를 기다리기도 했다가 중국 대륙에까지 그 용맹을 떨친 (그에게 깨진 금나라 장군들 송나라와의 전투에서는 대활약했다고) 무인이었다가 고려 최고의 자리에도 올라 봤던 그의 인생 역정은 아마 그 첩첩산중의 고갯길을 돌아들면서도 다 회고하지 못할 이야기 투성이였겠지.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그의 성 ‘척씨’ 즉 곡산 척씨는 그가 시조로 기록돼 있지만 그 뒤 거의 단종된 것 같아. 지금 국내 인구 조사로도 척씨는 없다고 나오거든. 그가 세운 공에 비추어 보면 현대에도 수십만 명이 ‘곡산 척씨’를 자처하며 척씨 종친회에서 척씨 시조 고려국 문하시중 척준경 장군 제사를 지내 줄 법도 한데 척준경은 그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 뭐야. 우리 역사상 기록상으로는 단연 최고의 용장이 말이지.

당연하게도 그의 표준 영정 따위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윤관의 동북 정벌을 묘사한 그림 하나를 갖다 둔다. 선춘령에 ‘고려지경’ 즉 고려국 국경 표시석을 세우는 광경이지. 한 번 찾아 보렴. 누가 척준경일지.

 






척준경(拓俊京)

고려시대의 문관으로 황해도 곡산 출신이다. 고려판 국사무쌍, 화실겸비. 곡산 척씨의 중시조이기도 하다.

여진과의 전쟁에서 지대한 공을 세운 고려 최강의 맹장으로 금의 사묘아리, 송의 한세충과 비견될만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사 시간에 무신정권 배울 때 얼핏 들었던 것 같은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나마 성씨인 '척'씨가 흔하지 않아서 아주 잊혀지지는 않는다. 이 척(拓)이란 한자를 성씨로 읽을 때는 '척'이 아니라 '탁'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일생 초기
 
곡산에서 가난한 향리 곡산 척씨의 시조 척위공(拓謂恭)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의 향리는 맨 위의 호장부터 여러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고 호장, 부호장 쯤 되면 지방의 유력자로 상당한 권세를 가졌는데[8] 척준경은 집안이 가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호장급이 아닌 일선 행정업무를 담당한 하급 향리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지방제는 수령이 있든 없든 현에 행정업무를 보는 향리들이 따로 존재했기 때문.

어려서부터 학문보다는 무술 연마를 더 좋아했는데, 과거에 무과가 따로 없던 고려 시대, 그것도 가난한 집안에서 무술에 뜻을 두다 보니 아무래도 학문은 자연스럽게 멀리하고 무뢰배들과 친해지기 쉬웠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으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한동안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이리저리 떠돌던 중에, 경주로 흘러들었고 고려 11대 왕 문종의 3남 계림공 왕희의 집에 종자로 들어가게 된다. 나중에 그와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히게 되는 고려 인종은 숙종(왕희)의 손자가 된다. 이래저래 척준경과 왕실은 인연이 많았던 셈이다. 이 때의 인연으로 왕희가 어리고 몸이 약했던 14대 헌종을 대신해 왕위에 올랐을 때(사실상 찬탈) 추밀원의 말단관원으로 들어가 시설점검, 행사준비 같은 잡일을 하며 지냈다

 

북관유적도첩2(야연사준도)

 

대 여진(女眞) 전쟁기의 활약

1104년 2월, 여진족이 정주성을 침공했을 때, 전면패주의 위기에 몰린 총사령관 임간 막하에서 뛰어난 용력을 발휘하며 정평과 선덕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공을 세운다. 이 때, 척준경은 품계도 없는 하급관리인 별가(別駕) 직책에 있었다. 이 직책은 향리(鄕吏)의 자손중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작은 벼슬이었다. 척준경은 총사령관 임간(林幹)에게 직접 말 한 필과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품계도 없는 듣보잡이 사령관에게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매우 건방진 행동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임간은 척준경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기회를 잡은 척준경은 적장 2명을 죽여 여진족 추격대를 뿌리쳐 고려군이 전면패주하는 상황을 막았다.

그런데 이 때 뭔가 잘못되었는지, 공을 세웠음에도 옥에 갇혀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왜 투옥되었는지는 사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유추해보면 품계도 없는 하급관리가 건방지게 총사령관에게 요구한 게 높으신 분들의 눈에 거슬려서 괘씸죄를 적용했다거나, 공을 세운 것에 우쭐하다가 사고를 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척준경의 공을 시기하여 엉뚱한 죄를 뒤집어 씌워서 투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사람이 바로 윤관이다. 곤경에 빠진 것을 구해준 인연으로 윤관을 따라서, 여진족 정벌에 참가했고, 인간으로는 보기 힘든 무공을 세우게 된다.

윤관이 진격을 하던 도중 함흥 인근의 성에서 여진족이 성에 틀어박혀 거세게 저항했다. 여진족 족장들을 다소 비겁한 함정에 빠뜨려가며 마비시킨 윤관은 시일이 지체될 경우 여진족의 대응체계가 굳건해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척준경을 불러 장군 이관진의 지원 아래 성을 함락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척준경은 "죄를 지어서 죽을 몸이었던 저를 살려주신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칼과 방패를 들고 홀로 성벽 위로 올라가 추장 서너 명을 죽였다. 이걸 보고 사기가 오른 이관진 휘하 고려군은 기세를 올려 성을 함락시켰다.

병목 지형을 믿고 깊숙히 들어왔던 윤관은 우회로를 통해 침투한 여진 대부대의 기습을 받고 소수의 부하들만 거느린 채 포위된다. 부사령관 오연총이 화살에 맞고 윤관도 위기에 빠졌을 때, 척준경이 결사대 10명을 이끌고 윤관의 활로를 뚫으려 하자, 낭장(郞將) 계급으로 함께 전투 중이던 동생 척준신(拓俊臣)이 자살행위라면서 뜯어말리지만, 척준경은 "나는 한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늙으신 아버님을 부탁하마!!" 하며 돌격한다. 이렇게 척준경이 윤관을 구출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이유는, 윤관이 먼저 자신을 알아주고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척준경이 여진병사 10여명을 해치우며 악전고투하는 사이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해 윤관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척준경 역시 털끝 하나 안 다치고 살아돌아왔다. 이 때 윤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앞으로 너를 자식처럼 생각할 테니 너 역시 나를 아버지처럼 보라!"라면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윤관은 패잔병을 수습해 영주성으로 물러났는데 며칠 후 여진의 명장 알새가 군사 2만을 끌고 영주성을 공격해왔다. 고려군은 한차례 큰 패전으로 기세가 꺾인데다 병력과 군량이 모두 부족했다. 윤관 등 다른 모든 장수들은 "적이 많고 우리 군은 적으니 농성을 하면서 버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척준경은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병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인데, 성 안의 식량은 얼마 남지 않았고 외부에서 구원도 오지 않는데 어떻게 농성을 하는가?" 이라며 홀로 반대했다. 그리고 전투에 나서길 자청했다. 결사대를 이끌고 성을 나선 척준경은 여진군을 몰아내고 19개의 수급을 취했다. 척준경이 피리를 불며 개선하자 윤관 등 성 안에 있던 장수들이 누대에서 내려와 척준경의 손을 잡고 절을 하며 맞이했다고 한다.

두번이나 척준경 덕분에 구사일생한 윤관은 갈라전 각지에 넓게 분산된 병력을 한곳에 모아서 대응하기 위해 영주로 각 지역의 고려군을 소집했다. 권지승선 왕자지(王字之)는 윤관의 명령에 따라 공험진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영주로 향하다가 사현(史現)이 이끄는 여진군에게 기습을 당했다. 갑작스런 기습이라 고려군은 크게 패하고 왕자지는 타고있던 말까지 잃어버려 걸어야 했다. 급보를 들은 척준경은 구원에 나섰다. 척준경의 구원군이 도착하자 사현의 군대는 일거에 패해 도망쳤고 척준경은 말을 잃은 왕자지를 위해 철갑마 한 필을 노획해 선물해주었다.

동년 2월 알새는 고려 주력군이 집결한 영주성 대신 최홍정이 지키는 웅주성을 공격했다. 최홍정이 이끄는 고려군은 여진군이 완전히 자리잡지 못했을때 성문을 열고 일시에 공격하는 방법으로 한 차례 대승을 거두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여진군의 포위는 더욱 견고해졌다. 최홍정은 성 안에 있던 척준경에게 "당신이 포위를 뚫고 외부로 나가 구원군을 이끌고 오지 않는다면 성 안의 사졸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척준경은 밤중에 해진 옷을 입고 성벽을 타고 내려와 단신으로 포위망을 돌파한 뒤 고려 국경인 정주까지 내달려 병력을 집결, 통태진, 야등포, 길주를 거치며 만나는 여진군을 모두 격파한 다음 최종적으로 웅주성 방어군과 연합해 성을 포위한 여진군을 격파해 웅주성을 구해냈다.

이후 완안부가 유격전으로 전략을 바꿔 10개 대로 나뉘어 돌아가면서 고려군을 기습하자 척준경은 왕자지와 함께 일종의 기동부대를 편성해 유격전을 벌이는 여진군과 교전을 벌였다. 9성 원정 후반부는 고려군이 갈라수에서 5~7만의 군사를 잃고 참패하는 등 전체적으로 답답한 진행이 이어졌는데 그나마 기동대를 이끈 척준경과 왕자지는 소소하게나마 전과를 냈다.

이 때 경험한 여진의 강대한 힘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후일 이자겸과 함께 대금 사대를 주도했다. 척준경은 후대의 묘청이나 정지상과 달리 도리어 여진과 직접 싸웠고 큰 공을 세운 인물인데도 화의를 주장한 것이다. 정치적인 고려를 하고 움직이는 인물은 아니지만 군사적으론 전문가인 만큼 이 때의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금에 사대하는 것이 전쟁보다는 낫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 치킨 호크 문서에서 나오는 것처럼, 전쟁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강경책을 주장하는 반면 참전 인사가 오히려 유화책을 쓴 사례는 의외로 흔하다. 꼭 전쟁 경험이 있다고 해서 강경책을 고집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이다.


북관유적도첩5(등림영회도)

 

전쟁 이후
여진 정벌 이후에는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당대 고려의 실세였던 이자겸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또한 이자겸의 6남이 척준경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서로 사돈지간까지 되어서 이자겸의 권세를 더욱 높여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인종 초기 이자겸의 득세는, 인종의 어린 나이(즉위 시 14세)에서 비롯됐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린 조카에게 찬탈을 해서 왕위에 오름을 알고 있는 예종 (인종의 아버지)은 아들의 안전한 제위를 위해 자신의 장인 이자겸과 사돈지간을 맺고 전공도 크고 나름대로 신뢰할 만한 척준경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자겸은 인종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종친 왕보 그와 결탁한 관료 한안인 등을 귀양보냈는데 한안인은 귀양길 도중 이자겸이 사람들을 보내 바다에 수장시켰다는 기록을 보아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던 것 같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양으로 안심시켰다가 별안간 죽여버리는 일이 있다. 이런 과격한 조치로 인해 인종의 제위를 안정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자겸의 무력을 담당한 척준경인 그의 지원을 받아, 무신은 정3품 상장군까지만 벼슬을 할 수 있다는 당시의 원칙을 뛰어넘어 정2품의 벼슬인 평장사에 오른다.

하지만 그 이자겸이 문제였다. 이자겸은 강대해진 자신의 권력을 바탕으로 도를 넘어설 정도로 지나치게 권세를 부리기 시작했고 이는 성인이 되어 가는 인종을 자극하게 된다. 인종이 18세가 되던 해, 반 이자겸의 세력인 김찬과 안보린이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서는 궁궐 내에 있던 이자겸의 끄나풀들을 죽여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군사를 일으켰다기 보다는 이자겸의 세력을 견제하려던 인종의 밀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종은 자신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어른이라며 망설였지만, 더 이상 이자겸의 전횡을 방치하기 어렵고, 성년이 되었으므로 자신이 직접 정사를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김찬과 안보린의 거사를 허락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에 척준경의 아들 척순(拓純)과 동생인 척준신(拓俊臣)이 반 이자겸 세력에게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척준경은 이에 격노하여 이자겸과 함께 궁궐로 쳐들어간 후, 궁성을 중심으로 농성전을 벌이던 반 이자겸 세력을 한방에 밀어붙인 다음 일거에 척살하여 이자겸을 구하고 더 나아가 그가 고려의 실권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때 궁궐에 불을 지른 일 등으로 인해 포함해 고려사 반역열전에 실리는 불명예를 안고 만다.

이후에 사건이 하나 터지는데, 이자겸과 척준경의 하인들이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서로간에 주인을 '역적'이라고 욕하는 일이 생긴다. 일설에 의하면 이자겸네 하인이 척준경의 하인더러 "너네 주인은 대궐에 불을 질렀으니까 사형감이지!"라고 한 게 싸움의 핵심이라 한다. 즉 척준경은 졸지에 쓰고 버리는 신세가 된 격. 사실 척준경의 하인이 발끈한 진짜 이유는, 주인이 욕을 먹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다음에 나온 말, "너희 주인이 역적이면 너도 관노로 끌려가야 마땅하지."라는 소리에 냉큼 척준경에게 달려가 일러바쳤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모욕을 얻어먹었으니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게 된다. 척준경은 즉각 이자겸의 집으로 쳐들어가 관과 겉옷을 집어던지며(!) 다 때려치겠다고 깽판을 부렸으나, 이자겸도 자기에게 척준경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기에 오히려 아들들을 보내 척준경을 어르고 달래기에 바빴다. 하지만 한 번 어긋난 이 둘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인종은 척준경과 이자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난 틈을 타서 최사전을 통하여[14] 척준경에게 보물과 친서를 하사하며 회유를 시도하였다. 척준경은 본래 성품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순수한 편이었고, 인종에게 죄를 범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설득에 응하여 이자겸을 체포하러 나선다. 그리고 워낙 갑자기 연락을 받은데다가 병부에서 인사업무를 처리하던 중, 이자겸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급보를 받고 출동했다. 워낙 급하게 벌어진 일이다보니 휘하 병력이라고는 심복장교 몇몇에 노비 20여 명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무기 꺼내올 시간도 없어서 길가의 울타리를 부숴서 나무 몽둥이를 뽑아들고 대궐로 달려갔다. 다만 대궐로 들어가서 제대로 무장을 하긴 했다.

이때에도 먼치킨스러운 활약이 잘 드러나는데, 인종과 함께 병사들을 인솔하여 궁을 나서다가 이자겸의 반군들이 활을 쏘아 공격해오자 고함소리 한 번 내지르는 것만으로도 반군들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반군들이 인종을 보고 활을 쏘며 달려들자 척준경은 칼을 뽑아 고함치며 돌진했고, 반군들이 전부 도망치는 바람에 졸지에 이자겸이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의 활약으로 이자겸과 그 식솔들이 모조리 붙잡혔고 반군들은 진압되었다. 사실 이전에 벌어진 인종의 친위쿠데타도, 인종이 직접 진압군(?)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해산을 종용하는 바람에 이자겸이 패할 뻔했으나, 척준경이 호령하여 진압군을 다시 휘어잡고 공성전을 벌이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한다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공으로 척준경은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문하시중이란 나라의 모든 정치를 총괄하는 대신으로 종1품이다. 조선의 영의정과 동일한 수준의 일인지하 만인지상 지위였으나 척준경은 스스로 계품을 뛰어넘었다며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하지만 몇 달 후 공신각에 그의 화상이 걸리어 고려의 신하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이때 그가 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믿고 발호(跋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척준경의 절정기

어쨌건 이듬해 정지상이 "이자겸을 잡은 건 일시의 공로요, 궁궐에 불을 지른 사건은 만세(萬世)의 죄인이니, 폐하께서 비록 사람에게 차마 못하시는 마음이 있으나, 어찌 일시의 공으로 만세의 죄를 덮겠습니까."라는 진언을 올렸고, 인종 역시 내심 척준경이 홀로 권력을 잡고 있는것을 꺼리는 마음이 있긴 했기에, 결국 직위를 박탈 당하고 귀향을 가게 된다.

인종은 그로부터 1년 뒤에 고향인 곡주로 귀양이 아닌 귀향을 보냈다.다만 아래에도 나오듯 귀향형은 인종이 특별히 배려해주기 때문에 척준경과는 관계없다.

인종은 이후에도 척준경의 자손들에게 사면령을 내려주고 죄도 더 이상 안 묻도록 하는 등 지속적으로 은전을 베풀었다. 그리고 17년 후, "비록 신하의 도리를 잃었으나 사직을 지킨 공이 있다."고 하여 척준경에게 다시 벼슬을 주고 불러오게 된다. 그러나 그는 벼슬을 수여받고 복권된 지 얼마 못 가서 등창(등에 난 종기)으로 사망하게 된다




북관유적도첩7(수책거적도)

 

평가

고려 시대 최고의 무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행적을 보여주었다.

윤관 휘하로 들어가기 전부터 뛰어난 맹장으로서의 편린을 보였고, 윤관 휘하로 들어가서는 그 윤관의 기록 대부분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지대한 공을 세웠다. 9성을 세울 그곳의 지형조차 제대로 다 파악하지 못한채 벌어졌던 9성 정벌은 그가 없었다면 윤관이 전사하는 비극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믿고 따를 수 있었던 상관인 윤관과 오연총이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최홍정, 이관진 등 함께 활약한 장군 상당수가 소리소문없이 잊혀져 간 가운데 그는 이자겸 일파가 되어 권세를 지켰고, 그의 지원으로 무신으로선 꿈도 못꾸던 정2품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로인해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어 이자겸의 난때 동생과 아들이 화를 입었고, 본인은 인종의 중재를 무산시키고 궁궐을 방화하여 반역열전에 이름을 올린다. 인종 세력이 먼저 동생과 아들을 죽였으니 척준경의 행동이 더 이치에 맞지 않냐고 할 수도 있는데, 인종 쪽도 국정을 농단하는 권신과 그 일파를 친다는 명분이 있었으니, 확실히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던 척준경이 억울하다고 할 순 없다.

이후 이자겸과 사이가 벌어진 틈에 지다방사(知茶房事) 최사전(崔思全)과 병부 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이 척준경을 타이르고, 이자겸의 난전에 낙향했을때부터 자신을 신임해준 인종의 개입으로 이자겸을 몰락시키고 본인이 최고 권력자가 된다. 그리고 최고의 권세를 지닌 순간에 탄핵에 너무나 순순히 응해 귀향을 가게된다. 다시 인종의 부름이 있었지만 곧 죽음으로서 예전의 권세를 다시 누리지는 못했다.

길게 보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무신정권과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 천도운동의 중심인물인 정지상이 이때 척준경을 탄핵한 공로로 정계의 중심인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여진 정벌 등의 전공으로 세력을 이루었던 무신들은 여진 정벌 이후 문신들의 견제로 이미 정계에서 밀려난 상황에서 남은 이들은 최고 전쟁영웅 척준경에 동조하거나 그에 반대하여 대립하다가 많이들 숙청당해서 한동안 무신들의 권력 공백상태가 이어졌기에, 후자의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할수 있을 것이다. 이자겸이 척준경에게 던진 당근은 그 이전까지 고려 무신들의 승진 상한 품계를 넘는 정2품 벼슬이었다. 이자겸의 난으로 인해 이자겸이 몰락하고, 이후에 척준경 또한 실각하면서 척준경 승진의 반작용으로 무신들의 품계는 정3품으로 도로 떨어지고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해진다. 물론, 무신정변이 일어난 실질적인 이유는 의종 후반대의 지나친 문신 우대 때문이긴 했었지만.

정리 하자면, 척준경 본인은 순수한 무인으로 충신도 간신(역신)도 아니며 권신조차 아니었다. 성품이 고결하지 않았지만 표리부동하지도 않았고 전장에선 일당백이나 큰 그림을 그리거나 정국을 주도할 능력이 없어서 반드시 본인을 써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하필 그게 권신 이자겸이라 그 전횡에 일조하다 반역열전에 이름을 올렸다.

일부에서는 단신으로 너무 엄청난 전공을 세워서 과장된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당장 척준경과 같은 전장에서 활약하여 어마어마한 전과를 올린 금의 명장 사묘아리의 열전이나 척준경과 사묘아리가 활약하던 시기엔 약관의 청년이었던 남송의 한세충 열전에 전해지는 무용은 결코 척준경보다 떨어지지 않는다. 또 고려사 자체가 조선에서 쓰여진데다 태조인 이성계와는 달리 조선과 척준경은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에 특별히 미화해 줄 필요가 없기도 하다.

재미있는건 거란이 금으로 대체되는 시기상으로도 척준경과 사묘아리, 한세충과 사묘아리가 서로 전장에서 어떤 형태로 든 만났을 개언성 자체도 충분히 있다.







일화와 여담

젊어서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 보려고도 했으나, 배움이 없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지 못했다. 근데 또 행정업무 외엔 나름 지식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나이 들어 좀 배워보려 한 건지, 인종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하루는 인종이 깨 5되와 황규(黃葵. 누런 아욱) 3되를 얻은 꿈을 꾸고 이를 척준경에게 말하자


깨는 한자(漢字)로 임(荏)이요, 임(荏)은 임(任) 자와 음이 같으니, 임(任) 자 성을 가진 후비를 맞을 징조요, 그 수가 다섯이란 것은 다섯 아들을 둘 상서입니다. 황(黃)은 황(皇)과 음이 같으니 임금의 황(皇)과 같은 뜻이고, 규(葵)란 것은 바로 규(揆)와 음이 같으니 도(道)로 다스린다는 의미의 규(揆)와 같고, 황규(黃葵)란 것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요, 그 수가 셋이 된 것은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이 임금이 될 징조입니다.

- 《고려사절요》에서.
 

[고려사절요] 역사속에 죽주성전투
이자겸의 두 딸이 폐비된 후 인종이 후비로 맞은 여인은 공예태후 임씨였으며, 그녀가 낳은 다섯 아들 가운데 의종, 명종, 신종이 왕이 되었다. 결코 좋은 의도와 결과는 아니었지만…. 일단 고려는 형이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으면 동생이 뒤를 잇는게 자연스러웠다.

성격은 전형적인 무인상으로 다혈질에 의리있는 사나이로 보이는데, 자신을 인정해 준 윤관을 목숨을 걸고 구출한 일화나, 전투 중에 말을 잃은 친구 왕자지를 위해 직접 여진족을 추격해 말을 가져다준 일화,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이자겸의 아들들에게 역정을 낸 일화 등에서 이런 성격을 알 수 있다. 한때 이런 성격 탓에 정치판을 버리고 낙향하려 하기도 했으나, 인종이 직접 사람을 보내 그를 달래가며 복귀시키기도 했다. 이 때가 아직 이자겸이 권세를 부리던 시절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후에 그에게 보낸 배려 등을 생각한다면, 인종도 그를 꽤나 아꼈던 듯하다.

동생 척준신 역시 무관으로 종사하며 형과 함께 여진정벌에 참여해 공을 세웠고, 형의 후광을 등에 업고 병부상서까지 올랐으나 이자겸의 난 직전에 인종의 친위세력들에게 살해당했다. 아들 척순은 내시로 근무하다가 척준신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고려사 卷一百三 > 列傳 卷第十六 > 諸臣 > 박서 > 송문주

1. 국경선까지 남진한 여진족들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서 임간을 파견했다가 임간이 대패하여 군진이 무너졌을 때 당시 중추원별가였던 척준경이 홀로 말을 타고 돌격하여
여진 선봉장을 참살하고 포로로 잡힌 고려군 200명을 빼앗아 왔다.   
  

2. 윤관의 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이 석성에 웅거하여 별무반의 앞길을 가로막자
윤관이 전전긍긍하였다. 이에 부관이었던 척준경이 이르기를
"신에게 보졸의 갑옷과 방패하나만 주시면 성문을 열어 보겠나이다" 라고 호언하였다.
척준경이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성벽으로 올라가
추장과 장군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성문을 열어 고려군이 성을 함락하였다    
    

3. 윤관과 오연총이 8천의 군사를 이끌고 협곡을 지나다가 5만에 달하는
여진족의 기습에 고려군이 다 무너져 겨우 1000여 명만 남았고,
오연총도 화살에 맞아 포위된 위급한 상황에 척준경이 즉시 100여기의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다.
이에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이 이르기를
"적진이 견고하여 좀처럼 돌파하지 못할 것 같으데 공연히 쓸데없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척준경이 말하기를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님을 봉양하라! 나는 이 한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사내의 의리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라고 소리치며 우뢰와같은 기합과 함께 100여기의 기병과 여진족의 후미를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척준경은 단숨에 여진족 부관 10여명을 참살하고 적장을 활로 쏘아 거꾸러 뜨렸다.
척준경과 10명의 용사들이 분투하여 최홍정과 이관진이 구원하고 윤관은 목숨을 건졌다.
(이 일로 윤관은 척준경과 부자의 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4. 여진족 보병과 기병 2만이 영주성 남쪽에 나타나 고려군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윤관과 임언이 방어만 하려고 하자, 척준경은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다.
"만일 출전하지 않고 있다가 적병은 날로 증가하고 성안의 양식은 다하여
원군도 오지 않을 경우에는 어찌합니까. 공들은 지난 날의 승첩을 보지 않았습니까?
오늘도 또 죽음을 힘을 다하여 싸울터이니 청컨데 공들은 성 위에서 보고 계십시오."
척준경이 결사대 100기를 이끌고 성을 나가 분전하여 적의 선봉장을 참살하고 적들을 패주시켰다.    
    

5. 척준경이 방어하고 있던 성이 포위되고 군량이 다해가자 지휘를 부관에게 맞기고 척준경은 원군을
부르기 위하여 사졸의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적진을 돌파하여 원군을 부르고 당도하여
원군과 함께 성을 포위하던 여진족들을 격파하였다.   
  

6. 1126년 5월, 이자겸이 인종을 시해하려 수백의 사병을 동원하여 궁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편으로는 인종이 달아날것을 우려하여 자객 다섯명을 어전(왕의 거처)으로 미리 보내었다.
어전 내부는 유혈이 낭자하여 내시와 궁녀들이 살해당하였다.
자객들이 인종에게 다가가려 하자 왕을 모시는 상선(내시 우두머리)이 두 팔을 벌려 자객들을
가로막고 버티었다.
이에 자객 우두머리 주충이 일시에 상선의 목을 잘라버리니 이제 어전에는 인종과 사관밖에 남지않았다.
자객들이 인종을 시해하려 에워싸려 하자 인종은 대경실색하여 문밖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그 순간 어전문이 통째로 박살나며 한 거구가 손에 피묻은 거대한 태도를 든 채로
숨을 가쁘게 쉬며 들어섰다.
거구는 문 앞에서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인종을 향해 우뢰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폐하! 신 척준경이 왔사옵니다! "

척준경의 갑옷은 이미 한차례 전투를 벌였는지 넝마가 되어있었고,
투구는 고사하고상투가 잘려 봉두난발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마치 그 모습이 조조의 장수 악래 전위가 현신한 듯 하여 자객들과
주충은 감히 먼저 공격하지 못했다.
척준경은 즉시 인종을 등 뒤로 숨기고 자객들에게 달려들어
두명을 베어넘기고 삽시간에 나머지 세명 모두 죽이고 인종을 구하였다.
이 공으로 인종은 척준경을 <추충 정국 협모 동덕 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권세를 함부로 부려 인종의 미움을 받다가 1127년에
“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功)이나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萬世)의 죄다.”라는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을 받아 암타도(巖墮島)에 유배되고, 이듬해 곡주로 이배되었다.
1130년에 “죄는 중하나 또한 공도 적지 않다.”하여 처자에게 직전(職田)을 돌려주었다.
1144년에 지난날의 공으로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朝奉大夫檢校戶部尙書)에 기용되었다가 곧 죽었다.
1146년 문하시랑평장사로 추복(追復)되었다.


< 고려사절요>

출처 : 우리 역사 최고의 용장 척준경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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